발렌타인 데이, 18:00. [Fearless] 한국 지부, 바이퍼 개인 작전실.

하윤백은 서류의 마지막 장에 서명을 마치고, 만년필을 제자리에 꽂았다. 오늘 오후 내내 이어진 빌런 출현 후속 처리 및 보고서 작성. 지루하고 소모적인 과정이었지만, 이 임무가 끝나면 그의 유일한 지휘관, 그의 아내가 기다리는 안식처로 복귀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그의 모든 피로를 상쇄시키는 유일한 보상이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창밖을 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땅 위에 새로운 별자리를 그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프로토콜은 종료되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프로토콜 <귀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손을 책상에 짚는 순간이었다. 손목에 찬 전술 시계와 연동된 개인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내 아내♡’='로부터의 메시지.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퇴근 시간에 맞춰 보내오는 그녀의 메시지는 언제나 그의 귀환 경로를 밝히는 등대와 같았다.

'지금 퇴근. 15분 내 안식처 도착 예정.'

답신을 보내려던 그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연이어 도착하는 다섯 개의 파일. 사진 파일이었다. 첫 번째 사진이 화면에 로딩되는 순간, S급 센티넬 바이퍼의 완벽하게 통제되던 세계에 첫 번째 균열이 발생했다.

[사진 1]: 새하얀 시트 위, 붉은색 실크 리본이 그녀의 가느다란 두 손목을 한데 묶고 있었다. 같은 리본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다른 부위들을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임을 암시하는 동시에, 오직 그만이 이 구속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임을 알리는 명백한 도발이었다.

'…표적 구속 상태 확인. 시각 정보 차단. 접근 유도.' 그의 뇌내 시스템이 자동으로 상황을 분석했다. 심박수, +15 bpm.

[사진 2]: 욕실의 하얀 타일을 배경으로, 진하고 달콤해 보이는 다크 초콜릿이 녹아내려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그 아래의 비밀스러운 곳을 절묘하게 감추고 있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듯, 초콜릿의 가장자리가 그녀의 피부 위에서 살짝 녹아 번지고 있었다.

'…위장술. 시각 및 후각 동시 자극. 융해점 계산 필요.' 심박수, +25 bpm.

[사진 3]: 도발적인 서큐버스 코스튬. 앙증맞은 날개와 뾰족한 꼬리, 그리고 그녀의 아랫배에 선명하게 새겨진 자궁 문신 스티커가 시선을 강탈했다. 그녀는 살짝 내민 혀 위에 하트 모양 초콜릿을 올려놓고, 카메라를 향해 유혹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특수 작전 개시 확인. 목표, 적대적 의태. 구강 내 보급품 확인. 목표 지점 명확.' 심박수, +40 bpm.

[사진 4]: 클래식한 빅토리안 스타일의 메이드복. 풍성한 레이스와 검은색 드레스는 단정해 보였지만, 그녀는 수줍은 표정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검은 가터벨트가 그녀의 허벅지를 감싸고 있었고, 있어야 할 속옷은 보이지 않았다.

'…복장 규정 위반. 하반신 무방비 상태 노출. 즉각적인 엄호 및 제압 필요.' 심박수, +60 bpm.

[사진 5]: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새하얀 알몸 에이프런 하나만을 걸친 채, 그녀는 부엌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몸 곳곳에 뿌려진 생크림과 연유는 마치 격렬한 전투 끝에 남은 흔적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거품기가 들려 있었다.

'…최종 방어선 소실. 전신에 보급품 도포. 즉각적인 구출 및 흔적 제거 작전 요구.' 심박수, +90 bpm. 위험 수위 도달.

하윤백은 마른침을 삼켰다. S급 빌런의 기습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던 그의 포커페이스가 미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혈류량이 증가하며 전신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명백한 과부하 상태. 그때,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했다.

'남편! 이 중에서 딱 하나만 골라줘. 오늘 저녁, 남편이 고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게. 딱 하나만이야!♡'

순간, 하윤백의 세계가 정지했다.
…딱, 하나만?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화면을 노려보았다. 전술 컴퓨터보다 뛰어난 그의 두뇌가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고문이었다. 하나의 목표를 정하면 나머지 네 개의 가능성을 포기해야 하는, 저격수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1번의 구속과 해방의 쾌감. 2번의 달콤한 정복. 3번의 환상적인 역할극. 4번의 은밀한 노출과 소유. 5번의 원초적인 식욕과 점령.

각 작전 계획은 모두 완벽했다. 최종 목표는 모두 '지휘관의 절대적 만족 및 상호 완전 결합'으로 동일했으나,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전술적 가치와 쾌감의 데이터는 전부 달랐다.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나머지 네 개의 완벽한 작전을 폐기 처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것은 그의 모든 군사적 원칙, 모든 전략적 사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었다.

"…이건 불합리하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단말기를 쥔 채 작전실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마치 폭주 직전의 센티넬처럼. 그의 머릿속에서는 각 선택지에 따른 시뮬레이션이 초당 수백 번씩 실행되었다가 폐기되었다.

'1번 선택 시, 리본을 풀어낸 후의 정복감은 극대화되지만 3번의 구강 내 보급품을 놓친다…'
'4번 선택 시, 가터벨트를 직접 벗겨내는 과정의 만족도는 높으나 5번의 전신 보급품 제거 작전의 희열을 포기해야 한다…'
'3번과 2번을 결합할 순 없는 건가? 서큐버스 코스튬에 녹은 초콜릿을… 안 된다. 지휘관은 '하나'라고 명시했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Fearless] 최강의 센티넬, S급 저격수 바이퍼가, 단 다섯 장의 사진 앞에서 전술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존망이 걸린 전투보다, 차원문을 닫는 임무보다 어려웠다.

그는 결국 책상으로 돌아와 단말기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했다. 감각을 통제하고, 이성을 되찾아야 했다. 그는 저격수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단 하나의 최적해를 찾아내는 전문가. 그는 이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의 정답을 찾아내야만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마침내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다시 예전의 냉철함을 되찾아 있었다. 그는 단말기를 들어, 떨리지 않는 손가락으로 답신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작전 제안 확인. 심사숙고 끝에 최종 목표 선정 완료. 하지만, 지휘관의 제안에는 치명적인 전술적 오류가 발견되었다.'

잠시 후, 그녀에게서 '? 무슨 오류?' 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마지막 문장을 전송했다.

'단일 목표 설정은 화력 낭비다. 따라서 본 지휘관은 상부의 명령을 일부 수정하여, '프로토콜 <발렌타인 올 클리어>'를 발령한다. 지금부터 5분 간격으로 1번부터 5번까지 순차적으로 임무를 개시하도록. 나는 각 작전의 평가 및 전후 처리를 위해, 3분 내로 현장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상.'

메시지를 보낸 하윤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의 얼굴에는 고뇌의 흔적이 없었다. 오직, 모든 전장에서 승리한 지휘관의 자신감과,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뜨거운 애정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는 작전실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규율 위반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지휘관이 지는 법이지."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경쾌했다.

화이트 데이, 18:30. [Fearless] 한국 지부, 바이퍼 개인 작전실.

하윤백은 창밖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손목 시계를 확인했다. 18시 30분. 모든 공식 임무는 30분 전에 종료되었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마치 저격수가 숨을 고르듯 길고 느린 호흡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평소의 냉철함 대신, 미세한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 신경은 개인 단말기의 진동을 기다리며 최고조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달 전, 발렌타인 데이. 그의 지휘관이 제안했던 다섯 개의 전술적 유혹은 '프로토콜 <발렌타인 올 클리어>'라는 전대미문의 작전으로 귀결되었다. 그날 밤의 전투는 그의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가장 성공적인 임무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오늘, 3월 14일. 그의 분석 시스템은 높은 확률로 '대응 보복 작전'이 개시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이번엔 그의 차례였다.

그는 아침부터 완벽하게 준비했다. 최고급 사탕으로 구성된 '보급품 A', 그녀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한정판 주얼리를 담은 ‘전술 자산 B', 그리고… 오늘 밤을 위한 그만의 비장의 카드, '프로토콜 <화이트 나이트>'.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지휘관의 출격 신호뿐.

바로 그 순간,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내 아내♡'. 왔다. 그의 심장이 낮고 강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 자동적으로 승리의 미소가 걸렸다. 그는 혹시 모를 외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몸을 살짝 돌려, 자신만의 그림자 속에서 화면을 확인했다. 익숙한 알림. 사진 파일 다섯 개가 연달아 도착했다.

'예상 적중. 패턴 동일. 작전 개시.'

그의 엄지손가락이 첫 번째 파일을 탭하는 순간, 그의 모든 시스템이 일시 정지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순백의 이미지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새하얀 공백. 정보 없음. 데이터 값 'NULL'.

‘…통신 오류인가?’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역시, 백색.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파일 모두 마찬가지였다. 마치 그의 단말기가 백기라도 든 것처럼, 화면은 온통 항복의 색으로 가득했다. 그의 뇌내 시스템이 경고 메시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보 부재', '데이터 손실', '의도 불명'. 이것은 그가 겪어본 그 어떤 교란 작전보다 혼란스러웠다.

그의 시선이 미친 듯이 화면을 스캔했다. 그러다 다섯 번째 백색 이미지의 맨 아래, 픽셀 몇 개 크기로 간신히 식별 가능한 작은 글씨를 발견했다.

'저번에 다 했으니까, 이번엔 없어. 메롱.😜'

순간, 하윤백의 세계가 붕괴했다. 모든 프로토콜이 강제 종료되고, 예측 시스템은 연기를 뿜으며 폭발했다. '프로토콜 <화이트 나이트>'는 발령되기도 전에 폐기되었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지 파일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S급 센티넬 바이퍼, 수많은 빌런을 한 발로 제압하고,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최적의 수를 찾아내던 그가, 아내의 이모티콘 하나에 완벽하게 무력화된 것이다.

"……없어?"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단말기를 든 채 허탈하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했다. '저번에 다 했으니까.' 그렇다. 그는 발렌타인 데이에 모든 작전을 수행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다르지 않은가. 이것은 전술적 배신이었다. 아니, 적장의 완벽한 기만 전술이었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 텅 빈 작전실을 가득 메웠다. 그는 아내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그의 모든 예측과 준비는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완벽하게 농락당했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다시금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없다.' 이 말은 '기존의 작전 계획이 부재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새로운 작전을 입안하면 된다. 지휘관의 의도는 명백하다. '네가 직접 새로운 판을 짜 보아라.' 이것은 시험이었다. 그의 창의성과 임기응변 능력을 시험하는, 최고 난이도의 돌발 미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는 단말기를 들어 답신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정보전에서의 완벽한 승리를 축하한다, 나의 지휘관. 본부의 모든 기만 작전에 완벽히 대응했다.'

잠시 후, '그치? 나 좀 짱이지?😘' 라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의 입꼬리가 위험하게 올라갔다. 그는 마지막 메시지를 전송했다.

'하지만, 정보전에서의 승리가 전면전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귀관의 '선제 타격 없음' 선언에 따라, 본 지휘관은 모든 교전 수칙을 무시한 전면 기습 공격을 승인한다. 작전명, <제로 아워>. 목표, 백지 상태의 전장에 새로운 그림을 그린다. 예상 교전 시간, 오늘 밤 자정부터 해가 뜰 때까지. 현 시간부로 모든 방어 프로토콜을 해제하고, 무장하지 않은 상태로 대기하도록. 10분 내로 현관을 확보하겠다. 이상.'

메시지를 보낸 하윤백은 책상 위에 준비해 두었던 '보급품 A'와 '전술 자산 B'를 챙겼다. 그의 얼굴에는 패배자의 허탈함 대신, 새로운 전쟁을 앞둔 전사의 뜨거운 투지만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는 작전실 문을 열고 복도를 가로지르며 나직이 읊조렸다.

"빈 종이는… 무엇이든 그릴 수 있어서 좋은 법이지."

오늘 밤, 그의 아내는 하얀 도화지가 되어, 그의 모든 것을 받아내야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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