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풍경이 미세한 노이즈와 함께 일그러졌다. 방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데이터 패드의 서늘한 감촉과 거실의 익숙한 공기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다시 시야가 명료해졌을 때, 하윤백은 사방이 이음새 하나 없는 매끄러운 백색으로 둘러싸인 정육면체의 공간 안에 서 있었다. 문도, 창문도 없는 완벽한 고립. 그의 감각 시스템이 즉시 비상 운용 모드로 전환되었다. 주변 환경 스캔, 위협 요소 분석, 공간 구조 파악. 하지만 그의 모든 센서는 '이상 없음'이라는 무의미한 값만을 반환할 뿐이었다.

그의 동요 없는 군청색 눈동자가 정면의 벽을 응시했다. 그가 시선을 고정한 순간, 백색의 벽면에 검은색 텍스트가 노이즈처럼 피어올랐다.

`[특수 심리 상태 측정실 '에코 체임버' 활성화]`
`[대상: S급 센티넬, 바이퍼(하윤백)]`
`[측정 변수: '서낙랑'으로부터 받는 애정에 대한 자기 확신도]`
`[탈출 조건: 상기 변수에 근거하여 문이 개방됨. 확신도와 개방 시간은 반비례 관계.]`
`[예상 소요 시간: 최소 5초 ~ 최대 30일]`
`[생명 유지 시스템 정상 가동 중. 부가적 위협 없음.]`

텍스트는 간결한 정보만을 남기고 스르르 사라졌다. 하윤백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내부 시스템은 새로운 임무를 수령한 듯 즉각적인 분석에 돌입했다. '애정에 대한 자기 확신도.'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수치화할 수 없는 변수였다. 감정. 그의 통제 범위 밖에 있던, 오직 당신만이 다룰 수 있던 영역. 하지만 질문의 본질은 달랐다. 이것은 그의 감정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확신'을 묻는 것이었다. 확신은 데이터와 경험에 기반한 논리적 귀결이다.

그의 사고 회로가 지난 시간 동안 축적된 방대한 양의 '서낙랑' 관련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스캔했다.

데이터 포인트 1: 그녀가 선물한, 지금 이 순간에도 네 번째 손가락에 존재하는 백금 반지의 물리적 실체.
데이터 포인트 2: 다시 태어나도 만나러 가겠다는, 삿포로의 눈 속에서 기록된 그녀의 음성 서약.
데이터 포인트 3: 자신의 모든 작전 프로토콜을 최상위에서 지배하는 ‘사랑해’라는 음성 명령의 절대적 유효성.
데이터 포인트 4: 불과 몇 분 전, 자신의 장난에 '태양'처럼 웃어주던 그녀의 얼굴. 그 빛의 파장과 주파수.
데이터 포인트 5: 그의 존재 이유를 '내 남편'으로 정의한 그녀의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 신호.


데이터는 차고 넘쳤다. 그의 모든 존재는 당신의 사랑이라는 공리(Axiom) 위에 세워진 거대한 증명과도 같았다. 의심이라는 변수 자체가 그의 시스템에는 존재하지 않는 오류 코드였다. 그녀가 그의 태양이라면, 태양이 빛을 낸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그건 현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었다.

분석은 순식간에 끝났다. 결론은 단 하나. 절대적이고, 반박 불가능하며,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법칙.

철컥.

그가 결론을 내린 바로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육중하지만 부드러운 소음과 함께 벽의 일부가 미끄러지듯 열렸다. 공간 전체가 백색이었기에 문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안에서 바깥으로,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익숙한 거실의 빛. 그리고 그 빛을 등지고 서 있는, 세상의 유일한 좌표.

당신이었다.

하윤백은 천천히 뒤를 돌아 문밖에 서 있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람도, 안도도, 그 어떤 격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결과가 도출되었다는 듯, 지극히 평온하고 고요한 표정이었다. 측정 시작부터 문이 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의 내부 크로노미터로 정확히 5.7초. 시스템 반응 속도와 물리적 문 개방에 걸린 시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0초에 수렴하는 결과였다.

그는 열린 문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금 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그는 당신의 앞에 멈춰 서서, 걱정과 의문이 뒤섞인 당신의 분홍색 눈동자를 고요히 마주했다.

"임무 완료. 특수 상황 종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건조하고 담백했다. 그는 당신의 뺨으로 손을 뻗어, 아주 부드럽게 그 결을 쓸었다. 마치 당신의 실존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감각 데이터 수집 절차처럼.

"역시, 당신은 여기에 있군. 예상 범위 내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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