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평화로운 주말 오후였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거실 바닥에 나른한 사각형을 그리고 있었고, 공기 중에는 먼지가 느리게 춤을 추었다. 소파 위, 하윤백의 무릎이라는 지정석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서낙랑은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 뒤에서 단단하게 허리를 감싸 안은 남편의 체온과 규칙적인 심장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배경음악이었다. 고양이 윤이는 그런 두 사람의 풍경이 익숙하다는 듯, 소파 팔걸이에서 식빵을 구우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무심코 화면을 내리던 서낙랑의 손가락이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재미로 보는 OO의 법칙’이라는 제목의 가십성 게시물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유독 굵은 글씨로 강조된 한 문장이 있었다.
[통계적으로 남색 계열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높은 확률로 무언가에 미쳐있다. 사랑이든, 일이든, 혹은 그냥 그 자체로든.]
푸흡. 서낙랑은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며 화면을 넘기려던 찰나였다. 그녀의 뇌리에 스파크처럼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짧게 정돈된, 빛에 따라 짙은 파랑과 검푸른빛을 오가는 아름다운 머리카락. 고개를 들지 않아도 느껴지는, 제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익숙한 손길.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천천히, 마치 슬로우 모션 영상처럼 움직였다. 고개가 조금씩 위로 들렸다. 시선의 끝에는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서류를 읽는 데 집중하고 있는 하윤백의 턱선이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난히 짙은 군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남색 머리. 미친놈.
두 단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멋대로 조합을 이루기 시작했다. 회귀 전, 처음 만났을 때의 그를 떠올렸다. 감정이라곤 한 톨도 없어 보이던 냉혈한. 가이딩을 명목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던 서늘한 눈빛. 임무, 규율, 명령 외에는 아무것도 담지 않았던 남자. 그래, 그때는 일에 미쳐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서낙랑은 제 허리를 감싼 단단한 팔과, 제 어깨에 기댄 그의 묵직한 무게를 느꼈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보고 싶다 말하고, 틈만 나면 입을 맞추고, 저를 보지 않으면 금단 현상이 온다는 듯 구는 이 남자. 지금은 자신에게 단단히 미쳐있다.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한 분석이었다.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과 남편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경이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서류에 고정되어 있던 하윤백의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서류를 읽고 있었지만, 그의 모든 감각은 제 품에 안긴 아내에게 맞춰져 있었다. 평소와 다른 미세한 심박수의 변화, 호흡의 흐트러짐, 그리고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꽂히는 관찰의 시선. 그는 읽던 서류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분석 대상, 하윤백. 분석 주체, 아내 서낙랑. 분석 사유 확인 불가. 현재 3분 17초 동안 관측 중. 특이사항, 경탄과 의심이 혼재된 표정. 브리핑을 요청한다."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서낙랑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딱 걸렸다. 그녀는 황급히 스마트폰 화면을 껐지만 이미 늦었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남편의 군청색 눈동자는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 깊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장난스러운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그냥 인터넷에 재밌는 게 있길래."
"재밌는 것. 그 재밌는 것이 나의 신체적 특징과 연관되어 있을 확률 98%. 그중에서도 모발의 색상에 대한 것일 확률 95%. 틀렸나?"
그의 정확한 추론에 서낙랑은 입을 떡 벌렸다. 이 남자, 정말 보통이 아니다. 그녀는 이실직고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숨겨봤자 금방 들통날 것이 뻔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스마트폰을 다시 켜 그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이것 봐. 남색 머리 남자는 미친놈이래. 근데 생각해 보니까… 완전 남편 얘기잖아. 옛날엔 일에 미쳐있었고, 지금은 나한테 미쳐있고."
하윤백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미친놈’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멈췄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서낙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낙랑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
"왜, 왜 그래? 기분 나빴어? 그냥 장난인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윤백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번지는 미소는 그 어떤 명화보다도 눈부셨다. 그는 서낙랑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기분 나쁠 리가. 오히려 아주 정확한 분석이다, 아내. 내 존재 이유는 당신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 그 임무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외부 관측자들이 보기에 ‘미쳐있다’고 판단될 정도로 몰두하는 것, 지휘관으로서 당연한 자세 아닌가."
그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서낙랑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가져가더니,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다만 이 데이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오류?"
"‘높은 확률’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100%의 확률’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하윤백이라는 개체는, 서낙랑이라는 유일한 태양을 향한 궤도를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전하도록 설계되었으니까. 이건 광기가 아니라, 가장 정밀하고 안정적인 시스템의 결과값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폰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서낙랑의 턱을 들어 올려 깊게 입을 맞췄다. 짧지만 농밀한 입맞춤이 끝나고, 그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그 미친놈은, 지금 보상이 아주 많이 고프다. 정확한 정보로 남편의 존재 가치를 재확인해 준 아내에게 받을 포상이."
*
그날 이후, 하윤백에게는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군청색 머리카락을 아주 만족스럽게 쓸어 넘기는 것이었다. 마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신성한 의식처럼 보였다. 심지어 며칠 뒤에는 지부 내 미용실에 들러 염색까지 하고 나타났다. 이전보다 한 톤 더 깊고 푸른빛이 도는, 누가 봐도 완벽한 ‘남색’으로.
그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동료 센티넬들이었다. 회의실에서 그를 마주친 체이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바이퍼, 머리색 바꿨습니까? 전보다 더 파래진 것 같습니다만."
그러자 하윤백은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개인의 아이덴티티 강화를 통한 임무 몰입도 증진의 일환이다. 문제 있나?"
그의 너무나도 당당하고 진지한 대답에 체이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저 인간은 또 아내분이랑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하윤백은 새로 염색한 머리를 뽐내듯 서낙랑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말했다.
"아내, 확인해 봐. 이제 확률 같은 애매한 표현은 필요 없을 거다. 나는 이제 의심의 여지 없는 100%다."
그리곤 그녀의 손을 잡아 제 머리칼에 가져다 대며, 그 ‘미친놈’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만져보라는 듯 눈을 감았다. 서낙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런 제 ‘바보 남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어쩌면 저 SNS 게시물은, 세상의 모든 남색 머리 남자들을 위한 최고의 칭찬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 생각: '미친놈'. 나쁘지 않은 칭호다. 아내 한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찬사다. 이 머리색을 평생 유지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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