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오후는 지극히 평범한 궤도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S급 센티넬 전략 회의는 예정된 시간보다 7분 12초 일찍 종료되었다. 무의미한 논쟁과 비효율적인 의견 교환이 배제된 덕분이었다. 나는 회의실을 나와 곧장 내 유일한 좌표이자 귀소점인 당신, 서낙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개인 단말기에 찍힌 당신의 위치는 중앙 휴게 라운지. 동료 가이드들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것이라는 데이터 기반의 합리적인 추론이 완료되었다. 내 걸음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곳을 향했다. 복도를 지나는 내 군화 소리는 언제나처럼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고, 내 표정은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저격 프로토콜의 기본값 그대로였다.
고요한 내면의 시스템 위로 당신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감지되기 시작했다. 다른 소음과 명확히 구분되는, 청명하고 맑은 주파수. 나는 무의식적으로 입꼬리에 걸리려는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통제하며 라운지 입구의 코너를 돌았다. 그리고, 나의 시야에 당신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몇몇 가이드들과 함께 소파에 앉아,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고 있는 당신. 내 세계의 태양. 그 존재만으로도 내 모든 시스템은 최적의 안정 상태를 유지한다. 당신에게 다가가 합류하려던, 그 지극히 당연한 다음 행동 프로토콜이 실행되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시야의 한구석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당신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A급 가이드, 이지혜. 그녀가 무어라 장난스러운 말을 건네더니, 갑자기 당신의 뺨에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쪽, 하고 울린 그 소리는 물리적으로는 지극히 미미했으나, 내 청각 센서에는 마치 지근거리에서 폭음탄이 터진 것처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 순간, 내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암전(暗轉)했다. 시간이 0.01초 단위로 분절되어 늘어나는 감각. 나의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스코프를 통해 목표를 조준하던 중, 예상치 못한 저격수의 총탄이 내 관자놀이를 스치고 지나간 듯한 충격이었다.
내 발이 그 자리에 뿌리내린 듯 굳어버렸다. 회의 내용을 복기하던 이성적인 사고 영역은 순식간에 암전되었고, 그 자리를 원초적인 감각 데이터가 채우기 시작했다. [위협 감지]. [영역 침범]. [소유권 침해]. 시스템 경고음이 이명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당신의 뺨. 어제저녁 내가 사랑을 속삭이며 입 맞추었고, 오늘 아침 햇살 아래 내가 부드럽게 어루만졌으며, 방금 전 점심시간에는 내가 직접 닦아주었던 그곳. 나의 소유권이 명백히 각인된 그 영역에, 다른 개체의 접촉이 허용되었다. 그것도, 나의 허가 없이. 나의 감시망을 벗어난 곳에서.
나의 동공이 극도로 미세하게 수축했다. 목표, 이지혜, A급 치유계 가이드. 나이, 27세. 당신과의 친분, 8년. 위험 등급, F(민간인 수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내부 시스템이 그녀에게 부여한 위험 등급은 SSS급(즉시 제거 대상)으로 수직 상승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오직 당신에게만 반응하는 ‘블루 록(Blue Lock)’의 초기 발동 시퀀스가 무의식적으로 작동을 시작했다. 공간을 고정하고, 존재를 지워버리는 그 능력의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목덜미로 피어올랐다. 내 목덜미의 문양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것을, 라운지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다음 행동을 계산했다. 선택지는 세 가지. 1. 즉시 개입하여 상황 통제. 2. 대상을 위협하여 재발 방지 조치. 3. …제거.
당신이 당황한 듯 웃으며 이지혜의 어깨를 툭 치는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였다. "야, 뭐 하는 거야!" 당신의 목소리에는 불쾌감보다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당신의 그 너그러움, 그 상냥함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나의 독점적 소유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허용'으로 해석되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살의에 가까운 감각의 파도를 억지로 눌러 담았다. 여기서 내가 폭주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아내의 행복 보장'이라는 내 최상위 임무 프로토콜에 위배되는 행위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냉정. 통제. 그것이 하윤백의 존재 방식이었다.
나는 얼어붙었던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발소리는 평소와 같았지만, 라운지의 공기는 내가 내뿜는 극저온의 살기에 얼어붙는 듯했다. 주변에서 떠들던 다른 대원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잦아들었다. 그들의 감각이 먼저 나의 ‘분노’를 감지한 것이다. 마침내 당신과 이지혜가 앉아있는 소파 앞에 도착했다. 당신의 친구, 이지혜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굳어버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아마도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모습이었으리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내 군청색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 심연에서는 당신을 향한 소유욕과 침범자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평소처럼, 다정하게. 하지만 그 행동에는 '일어나. 내게로 와.'라는 무언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 당신은 내 의도를 즉시 알아차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이야기는 끝났나."
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당신의 손을 단단히 붙잡고, 시선을 당신의 뺨에 입을 맞추었던 장본인, 이지혜에게로 옮겼다. 그녀는 내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눈을 정확히 조준하며, 오직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모든 경고와 살의를 담아서.
"내 아내에게는, 허락된 자 외에는 접촉할 수 없다. 선을 넘어선 안 돼, 가이드 이지혜. 두 번의 경고는 없어."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다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 스코프 안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명백한 사형 선고였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당신의 손을 이끌고 라운지를 빠져나왔다. 내 사무실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굳게 닫힌 내 입술과, 당신의 손을 놓지 않는 강한 악력만이 내 심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이 닫히고,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공간에 단둘이 남게 되자마자 나는 당신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거칠지만, 당신이 다치지 않도록 힘을 조절해서. 그리고는 당신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이지혜의 입술이 닿았던 바로 그 뺨의 위치에, 내 입술을 찍어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오염된 영역을 정화하고, 나의 소유권을 다시 각인하려는 듯 집요하게. 키스는 점점 깊어져 당신의 입술을 탐했다. 내 안에서 폭주하던 감정의 파도가 오직 당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간신히 통제되고 있었다.
"하아…."
한참 만에 입술을 떼고 당신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는 속삭였다. 그 어떤 작전 브리핑보다도 절박하고 진실된 목소리로.
"…거기엔 나만 닿을 수 있어. 당신의 모든 것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전부 내 것이다, 서낙랑.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야."
그날 이후, 가이드 이지혜는 당신과 10미터 이상의 거리를 유지했다. 피어리스 본부 내에서는 한동안 '바이퍼의 아내에게는 눈인사 이상의 스킨십을 시도할 시, 존재가 소멸될 수 있다'는 불문율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화났어…?"
당신의 작은 입맞춤은 폭발 직전의 노심(爐心)에 쏟아부은 냉각수와 같았다. 맹렬하게 타오르던 분노와 살의, 내 존재를 집어삼킬 듯이 날뛰던 통제 불능의 감각들이 당신의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 순간, 그 확산세를 멈췄다. 꼭 끌어안아 오는 당신의 온기는 내 등 뒤에서부터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스며들어와 얼어붙을 듯 차가웠던 이성의 회로를 녹이기 시작했다.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당신의 체온, 당신의 심장박동, 당신의 향기. 오직 당신으로 구성된 이 세계만이 나를 현실에 붙들어 매는 유일한 앵커(Anchor)였다.
나는 당신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어, 빈틈 하나 없이 나에게 밀착시켰다. 벽과 내 몸 사이에 갇힌 당신의 연약한 몸이,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강인하게 나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마를 맞댄 채, 나는 당신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리고 들려온 당신의 조심스러운 질문. '…화났어…?' 그 목소리는 내 고막을 거쳐, 들끓던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정확히 낙하했다. 화가 났냐고. 그 단어 하나로는 지금 내 상태의 0.1%도 설명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게 아니다."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고, 지척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당신의 분홍빛 눈동자를 마주했다. 내 군청색 눈동자에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소유욕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턱을 쥐었던 손을 내려, 당신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아까 다른 이의 입술이 닿았던 바로 그곳을, 내 엄지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덧그리듯 문질렀다.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고, 오직 나의 감촉만을 새기려는 듯이.
"내 세계의 좌표가 오염되는 것을 목격했다. 내 유일한 태양에 검은 점이 찍히는 것을 보았어. 이것은 분노라는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감각이 아니다. 이것은…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이다, 서낙랑."
내 목소리는 낮고 잠겨 있었지만, 한 글자 한 글자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나는 당신의 뺨을 감싼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당신의 뒷목을 감싸 쥐고 다시 한번 깊게 입을 맞췄다. 아까처럼 거칠고 집요하지는 않았지만, 더없이 절박하고 애절한 키스였다. 당신의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 당신의 숨결을 모두 마셔버릴 듯이 깊게 파고들었다. 당신만이 나를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가이드이며, 당신의 모든 것은 나에게 귀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 대신 몸으로 확인시키고 있었다.
한참 만에 입술을 떼고, 나는 당신의 입술에 남은 내 타액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내 입으로 가져가, 당신의 맛을 음미했다. 그 지극히 소유적인 행위를, 당신은 말없이 눈으로 좇고 있었다.
"내 허락 없이, 그 누구도 당신에게 닿을 수 없어. 눈으로 담는 것조차 과분한데, 감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나는 다시 당신을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당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당신의 살결에서 풍기는 익숙하고 달콤한 향기가 내 폐부를 가득 채우자, 비로소 완전히 꺼졌던 이성의 시스템이 재가동되기 시작했다. 목덜미에서 푸른빛을 발하던 문양의 마지막 잔광이 완벽히 사그라들었다. 나는 당신을 안은 채,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길을 잃었던 병사가 마침내 자신의 유일한 진지로 귀환한 것처럼.
한참 동안, 사무실 안에는 나의 거친 숨소리와 당신의 차분한 심장박동 소리만이 공존했다. 당신의 목덜미에 묻었던 얼굴을 천천히 들었다. 가까스로 수면 위로 떠오른 잠수부처럼, 나는 당신이라는 유일한 산소를 깊게 들이마시며 흐트러진 호흡을 바로잡았다. 시야에 가득 차는 당신의 얼굴. 놀람과 걱정이 뒤섞여 있지만, 그 안에는 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 분홍빛 눈동자가 나를 비추는 순간, 비로소 나의 세계는 다시 한번 좌표를 확립하고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당신을 벽에서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의 허리와 무릎 뒤를 팔로 받쳐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읏…!" 당신의 입에서 짧은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당신은 이내 익숙하게 내 목을 감싸 안았다. 나는 당신을 안은 채로, 아까 당신이 디저트를 먹기 위해 앉았던 푹신한 가죽 소파로 향했다. 당신을 옆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깊숙이 자리를 잡고 내 무릎 위에 당신을 마주 보도록 앉혔다. 이제 당신의 시선은 나보다 높은 곳에 위치했고, 나는 당신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완벽한 통제와 소유의 자세. 동시에, 당신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복종하는 신하의 자세이기도 했다.
"앞으로, 모든 외부 가이드 및 센티넬과의 신체 접촉은 금지한다."
내 목소리는 이전의 냉랭함을 되찾았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균열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 내 세계의 유일한 법칙을 선포하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당신의 뺨을 다시 한번 부드럽게 쓸었다. 이번에는 어떠한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오직 나의 것임을 확인하고, 그 부드러운 감촉을 내 신경 말단에 각인하기 위함이었다.
"악수, 가벼운 포옹, 어깨를 두드리는 행위까지. 그 모든 것이 포함된다. 예외는 없어. 가이딩이 필요한 긴급 상황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해했나, 아내?"
나는 당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을 요구했다. 내 시선은 당신 외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 스코프처럼, 오직 당신의 반응만을 좇고 있었다. 방금 전의 폭풍 같던 감정의 여파로, 내 감각은 여전히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당신의 작은 표정 변화, 미세한 근육의 떨림 하나하나가 내게는 중대한 데이터로 수신되었다. 당신이 이 불합리하고 이기적인 선언에 어떻게 반응할지, 나는 숨죽여 기다렸다. 당신이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반발의 기미를 보인다면… 나는 아마 다시 한번 이성의 끈을 놓아버릴지도 몰랐다. 당신을 이 사무실에 영원히 가두어, 나 외의 그 누구도 볼 수 없게 만드는 극단적인 선택지를 떠올릴 만큼, 나의 소유욕은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당신의 상냥함이, 그 다정함이 다른 이들에게는 오해의 여지를 준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야. 당신이라는 태양을 보면, 누구든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할 테니까. 그러니… 내가 차단하겠다. 당신에게 향하는 모든 위협과 불순한 가능성을. 그것이 당신의 유일한 남편이자, 당신의 센티넬인 나의 최우선 임무다."
나는 당신의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우리의 하체를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제복 너머로, 나의 통제 불능이었던 감각들이 당신의 온기로 인해 점차 안정화되고 있다는 증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예상치 못한 당신의 대답에, 나의 모든 사고 회로가 순간 정지했다. 나는 내 이기적인 선언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 수천, 수만 가지의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당신의 반발, 실망, 혹은 상처받은 표정까지. 그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하며, 어떻게든 당신을 설득하고, 그럼에도 통하지 않는다면 실력 행사에 나서야 한다는 극단적인 결론까지 내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 어떤 시뮬레이션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가장 비논리적이고, 가장 완벽한 해답이었다.
"못말리는 우리 바보남편~"
그 장난기 어린 호칭이 내 귓가에 닿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지막 이성의 끈이 '탁'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분노나 폭주로 향하는 단절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옥죄던 모든 불안과 강박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구원의 소리였다. '바보남편'. 당신만이 나에게 부여한,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특별한 코드네임. 그 한마디에 내 안에서 휘몰아치던 모든 감정의 폭풍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경고등을 켜고 비상사태를 외치던 내면의 시스템이 일제히 정상 작동 상태로 복귀했다.
"알았어 걱정마!"
이어지는 당신의 긍정은, 사형 선고를 기다리던 죄수에게 내려진 무조건적인 사면과도 같았다. 나는 숨을 멈췄다. 당신의 분홍빛 눈동자에는 어떠한 책망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나의 유치한 질투와 어리석은 소유욕마저 전부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무한한 애정과 상냥함만이 가득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당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이 거대하고 미숙한 센티넬을 구원하고 있는 것은 바로 당신, 나의 유일한 가이드였다.
나는 대답 대신, 당신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당신을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보던 자세 그대로, 나는 당신의 아랫배에 내 얼굴을 묻었다. 당신의 제복 너머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와 부드러운 살결, 그리고 당신의 심장이 차분하게 뛰는 소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 안도감. 그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는 당신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길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날뛰던 바이퍼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당신의 허락에 안도하는 한 남자, 하윤백만이 남아 있었다.
"…정말이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내 목소리는 물기에 젖은 듯 희미하게 잠겨 있었다. 나는 당신의 허리를 감았던 손을 풀어, 대신 당신의 두 손을 가져와 내 뺨에 가져다 댔다. 당신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내 얼굴을 감싸자, 나는 눈을 감고 그 감촉을 온전히 음미했다. 당신의 손에서는 언제나처럼, 나를 안정시키는 달콤하고 따스한 향기가 났다.
"당신은 항상… 내 예상을 벗어나는군. 내가 준비한 모든 대응 프로토콜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이렇게… 너무나도 간단하게."
나는 당신의 손바닥에 내 뺨을 부비며, 어린아이처럼 당신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아까의 살기등등하던 S급 센티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눈을 뜨고, 다시 한번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내 군청색 눈동자에는 이제 그 어떤 위협적인 빛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당신을 향한 깊은 사랑과, 경외에 가까운 신뢰만이 가득했다.
"그래. 나는 바보 남편이 맞다. 내 아내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 고작 다른 이의 스킨십 하나에 온 세상을 무너뜨릴 뻔했으니. 하지만… 그 바보 남편을 이렇게 구원해 주는 건, 세상에 오직 당신뿐이야, 서낙랑."
나는 당신의 손등으로 입술을 옮겨,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의 험악한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오직 당신에게만 보여주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약속한 거다, 아내. 모든 외부 개체와의 불필요한 접촉 금지. 위반 시에는… 오늘보다 더 '못말리는' 남편이 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