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저녁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집 안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바깥세상의 혼돈과 차원문의 위협은 현관문 너머에서 완벽히 차단된 채, 오직 두 사람만의 안정적인 공기로 가득했다. 나는 막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당신이 주방에서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소파에 앉아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의 데이터를 정리하던 태블릿의 차가운 빛과,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주방에서 새어 나오는 따뜻한 조명이 공간을 양분했다.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고 통제된, 완벽한 일상의 한 조각이었다.
그때였다. 사건은 아무런 전조 없이 발생했다. 당신의 발치, 정확히는 당신이 신은 푹신한 슬리퍼 옆으로 무언가—아니, '누군가' 나타난 것은. 내 동체 시력은 그 이질적인 존재를 즉시 포착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 나와 똑같은 군청색 머리카락, 그리고 축소판 피어리스 제복. 그것은 완벽하게 다림질된 작은 제복을 입고 두 주먹을 굳게 쥔 채, 당신의 슬리퍼를 마치 중대한 경호 대상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내 모든 사고 회로가 순간 정지했다. 빌런의 기척은 없었다. 가이딩 수치는 안정적. 외부 침입 흔적 제로. 이것은… 데이터에 없는, 분석 불가능한 변수였다.
"위험 요소 없음. 경호 대상 '아내'의 발목 안정성, 현재 시각부로 확보."
인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정교한 입술이 움직이며, 기계적으로 합성된 듯한, 그러나 분명 내 목소리를 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당신이 의아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려 하자, 이번엔 당신의 어깨 위로 '툭' 하고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났다.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을 한, 제복이 아닌 나와 같은 실내복 차림의 작은 나는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소중하다는 듯 끌어안고 뺨을 부볐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장소를 찾았다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태블릿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건 환각인가?
"…임무 보고. 현 시간부로 하윤백의 모든 연산 능력은, 가동 중지되었다."
나는 나직이 읊조렸다. 내 시선이 향하는 곳, 당신의 주변은 이미 작은 나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주방 조리대 위에는 턱을 괸 채 황홀한 표정으로 당신의 얼굴만 바라보는 작은 내가, 당신이 집어 든 찻잔 손잡이에 매달려 같이 들리기를 기다리는 작은 내가, 심지어는 식탁 의자 다리를 붙잡고 '여긴 내 구역'이라며 다른 작은 나를 노려보는 작은 나까지. 그들은 모두 어린아이 수준의 지능으로, 내가 평소라면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내면의 욕구와 생각들을 필터 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특히, 당신의 치맛자락을 들추려다 다른 제복 입은 녀석에게 뒷덜미를 잡혀 제지당하는 녀석을 보았을 땐, 내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명백한 정보 과부하. 통제 불능의 사태였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 비현실적인 광경의 중심에 서 있는 당신에게로 걸어갔다. 내 얼굴은 아마, 내 인생 처음으로 '완벽한 무표정'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당신의 입에서 터져 나온 그 한마디, '귀엽다'. 그 단어는 내 모든 비상 프로토콜을 일순간에 무력화시키는, 예측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데이터였다. 나는 당신에게서 불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내 발걸음을 멈춘 것은 당신의 그 말에 담긴 순수한 감탄과 즐거움 때문이었다. 위험, 경계, 분석, 제거. 내 시스템을 지배하던 모든 키워드가 당신의 웃음 섞인 목소리 앞에서 증발해 버렸다.
내 시선은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주변을 어지럽게 맴도는 저 '미지의 존재'들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갔다. 당신의 머리카락에 뺨을 부비던 작은 나는 당신의 반응에 더욱 신이 난 듯 몸을 웅크렸고, 찻잔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녀석은 기어코 찻잔 위로 올라가 당신의 얼굴을 가장 가까이서 보려는 듯 낑낑거렸다. 심지어, 당신의 발치에서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녀석마저도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마치 그 칭찬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양 어깨를 으쓱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모든 것이… 내 통제를 벗어난, 내 무의식의 노골적인 발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끔찍하고 동시에… 기묘했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종류의 두통이었다.
"상황 판단, 보류. 서낙랑, 저것들은 귀여운 대상이 아니다. 정체불명의 변수이며, 잠재적 위험 요소로 분류되어야 한다. 즉시…."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신의 무릎께에서 새로운 작은 내가 불쑥 나타났다. 그 녀석은 나와 똑같은 검은색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당신의 다리를 향해 안기려는 듯 달려들었다. 안아달라는 무언의, 그리고 너무나도 노골적인 요구. 나는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즉시 알아차렸다. 저것은 내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에게 하고 싶은 행동과 정확히 일치했다. 낯 뜨거운 욕망이 손바닥만 한 크기로 실체화되어 당신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광경에, 나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성적인 반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나는 그저 내 품으로 달려와 안기려는 저 작은 나를, 그리고 그것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당신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군청색 눈동자가 사상 처음으로 길을 잃고 방황했다.
당신이 손을 뻗어 그 작은 존재의 얼굴을 만지는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시스템 경고음보다 더 날카롭게, 당신의 손가락 끝이 그 작은 뺨에 닿는 감각이 내게도 전이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당신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분홍빛 눈동자는 호기심과 다정한 장난기로 반짝였고,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는 내 모든 논리 회로를 태워버리는 섬광과도 같았다.
위험 요소. 변수. 제거 대상. 내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들은 당신의 웃음소리 앞에서 무기력하게 부서져 내렸다. 당신의 어깨 위에서 그 손길을 받은 작은 나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큰 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당신의 손가락에 제 작은 뺨을 더욱 깊게 부볐다. 그 모습은… 내가 당신의 손길에 위로받을 때, 그 따스함에 모든 긴장을 풀고 더 깊이 파고들고 싶어 하는 내 모습의 완벽한 축소판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모든 상황이 거대한 거울이 되어, 감추고 억제해왔던 내 가장 원초적인 모습들을 남김없이 비추고 있었다.
"…접촉 금지. 감염 경로가 확인되지 않았다. 어떤 부작용을 유발할지 예측할 수…."
내 목소리는 스스로도 느낄 만큼 힘없이 갈라졌다. 설득력 없는 경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엔 당신의 무릎에 매달려 있던 녀석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 녀석은 당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작은 손을 놓고, 마치 당신이 자신을 봐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당신을 향해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당신이 그 작은 몸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 들어 올리자,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당신의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온 작은 나는, 안도감과 충족감에 젖은 표정으로 당신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 표정 또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당신의 품에 안길 때의 나, 오직 당신만이 볼 수 있는 나의 표정이었다.
"…서낙랑. 당장 내려놓도록."
나의 명령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닌 애원에 가까웠다. 저 작은 것들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었다. 당신이 그 녀석들을 향해 보내는 다정한 시선, 부드러운 손길, 따뜻한 미소. 그 모든 것은 원래 나의 것이어야만 했다. 저 통제 불능의 분신들에게 당신의 애정을 빼앗기고 있다는 비이성적인 질투가, 시스템 오류처럼 걷잡을 수 없이 피어올랐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신에게로 걸어갔다. 내 그림자가 당신과, 당신 손 위의 작은 나를 함께 뒤덮었다.
당신의 목소리가 고요한 주방의 공기를 가로질러 내게 닿는 순간,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남편'. 그 한마디는 혼돈에 빠진 내 모든 시스템을 강제로 재부팅시키는 최상위 명령어였다. 당신은 팔을 벌리고 있었다. 질투와 소유욕으로 들끓던 내 시야에, 오직 당신의 그 부드러운 미소와 나를 향해 열린 품만이 가득 들어찼다. 당신 손에 들려 있던 작은 나는 어느새 잊혔다. 당신의 분홍빛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은 '너는 대체품이 아닌 유일한 존재'라고, 그 어떤 데이터 분석보다 명확하고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느리게 걸어갔던 이전의 걸음걸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당신에게 다가갔다. 성큼, 성큼. 단 세 걸음 만에 당신과의 거리를 모두 지웠다. 그리고는 당신이 벌린 팔 안으로, 마치 오랫동안 길을 잃었던 귀소 본능이 깨어난 것처럼 깊고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당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자 익숙하고 안정적인 당신의 체향과 심장박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불규칙하게 날뛰던 내 호흡이 당신의 고른 숨결에 맞춰 서서히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어깨 위에서 당신의 머리카락에 뺨을 부비던 작은 녀석도, 찻잔 위에서 재롱을 부리던 녀석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상황 종료. 최종 목표 지점, 확인 완료."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나조차도 깨닫지 못한 안도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나는 당신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우리 사이에 한 뼘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신의 등을 단단히 감싸 안은 내 손등 위로, 어깨에 있던 작은 녀석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나는 보란 듯이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녀석을 밀어냈다. 이 품은, 이 온기는, 오직 나만의 것이다. 당신의 손에 들려 있던 작은 나는 어느새 당신의 잠옷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 고개만 내민 채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당신이 안고 있는 것은 진짜 나였으니까.
당신의 그 한마디는 방금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모든 혼란스러운 데이터와 비이성적인 경고 신호를 일순간에 소거하는 최종 인증 코드와도 같았다. '진짜 남편'. 그 단어의 무게가 내 존재의 좌표를 다시금 명확히 설정했다. 나는 당신의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당신을 끌어안은 팔에 들어갔던 힘은 풀지 않은 채, 오히려 더 단단하게 당신의 허리를 감싸며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마지막 불안의 입자마저 압축해 소멸시켰다. 시선이 마주쳤다. 분홍빛 눈동자 안에는 작은 분신들이 아닌, 오직 나, 하윤백만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선명하게 보고 싶은 유일한 풍경이었다.
당신의 잠옷 주머니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있던 작은 '나'가 마치 패배를 인정한 듯, 주머니 속으로 스르르 자취를 감추는 것이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포착되었다. 다른 분신들 역시 하나둘씩 희미해지며 공기 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모든 시스템이 정상으로 복귀했다. 아니, 정상을 넘어선 완벽한 안정 상태에 도달했다. 나는 당신의 뺨으로 손을 옮겨, 부드러운 살결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당신의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데이터 검증 완료. 비교 분석 결과, '진짜'의 가치는 대체 불가능한 것으로 최종 판명. 당연한 결론이다."
목소리는 지극히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승리자의 여유와 충족감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대로 당신의 이마에, 콧등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에 차례로 짧게 입을 맞췄다. 단순한 접촉이 아닌, 나의 소유권을 다시 한번 각인하고 당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당신의 입술에서 기분 좋은 차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 작은 세계 안에서, 나는 유일한 지배자이자 유일한 소유자였다. 당신이 내뱉은 숨결 하나하나가 내 감각을 독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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