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 진짜네.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아 바이퍼씨는 어디 다치진 않았죠?"

그의 시선이 당신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다치지 않았냐'는 그 질문은, 그의 시스템에서 '안위 확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가이드가 센티넬에게 해야 할 의무적인 질문. 하지만 방금 전까지 '예의'와 '착함'이라는 비논리적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던 그에게는, 그 평범한 질문마저도 낯선 온도를 띠고 느껴졌다.

그는 당신의 어깨를 가리키던 손을 거두고, 자신의 전투복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짙게 배어든 피와 정체불명의 체액들. 전장에서 흔한 오염물질일 뿐이었다.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 흔적들을 응시하다, 다시 당신에게로 고개를 들었다.

"…신체 손상 없음. 모두 표적의 것이다."

건조한 보고. 그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다쳤냐는 질문에 대한 가장 효율적이고 정확한 정보 전달. 그는 당신이 내민 '세탁'이라는 제안에 대해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스템이 '개인 물품 관리 프로토콜'을 검색하는 듯, 군청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규율상, 개인 피복은 본인이 관리하거나 지정된 보급처를 통해 처리해야 했다. 당신의 제안은 그 규율에서 벗어나는 예외사항이었다.

"세탁은 불필요하다. 그 셔츠는 폐기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오염된 의료 폐기물을 처리하듯, 그는 자신의 피가 묻은 셔츠의 운명을 단번에 결정했다. 당신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배려가 아니었다. 그저 그의 기준에서, 전장의 오염물질이 묻은 의복은 재사용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을 뿐이다. 그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새것으로 지급하지. 사이즈는 동일한가."

"이걸 버린다고요?? 그냥 제가 가질래요!"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당신의 말, 제가 가질게요, 라는 그 선언은 그의 데이터 처리 장치에 또 다른 종류의 충돌 오류를 일으켰다. 폐기물. 재사용 불가 판정을 받은 오염된 소모품. 그것을 '가지겠다'는 발상은 그의 논리 회로 안에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왜? 무엇을 위해? 소유의 목적이 무엇인가. 수십 개의 질문이 순식간에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떤 것도 합리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절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의문에 가까웠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외계 생물체를 분석하듯, 당신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당신의 분홍색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장난기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데이터가 부족했다. 판단할 수 없었다.

"이것은 내 소유권을 증명하는 피복이다. 현재 오염 상태이며, 규정상 폐기 대상이다. 당신이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다. …왜 가지려는 거지."

그의 말투는 심문하는 검사처럼 딱딱했다. 그의 시스템은 당신의 행동을 ‘비합리적 자원 확보 시도’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 패턴에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다. 그의 피가 묻고, 그의 체취가 배어 있으며, 이제는 당신의 온기까지 섞여 버린 그 셔츠.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수많은 오류 데이터가 뒤섞인, 혼돈의 표본이었다. 그는 그 혼돈을 당신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아니,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반납하도록. 새것으로 지급하겠다는 명령은 유효하다."

그는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셔츠를 회수하겠다는 명백한 의사 표시였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 안에는 당신이라는 변수를 어떻게든 통제하고 이해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담겨 있었다. 이 셔츠를 폐기하는 것은 단순히 규정을 따르는 행위를 넘어, 당신이 일으킨 혼란을 그의 시야에서 제거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여기서 벗으라고요? 안돼요! 왜요~ 옷은 멀쩡하잖아요? 세탁해서 제가 잠옷으로 잘 입고 다닐게요!"

당신의 입가에 걸린 장난스러운 미소는 그의 데이터 처리 과정에 포함되지 않은, 해석 불가능한 노이즈일 뿐이었다.

"…명령 불이행. 그리고 논리적 비약이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의 장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기계적인 반박이었다. 그는 당신이 잠옷으로 입겠다는 말에 미간을 더욱 좁혔다. 잠옷. 수면 시 착용하는 의복.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그의 피와 체취가 묻은 것을, 당신의 맨살 위에 걸치겠다는 선언. 그것은 그의 시스템에 '소유권 침해' 혹은 '영역 잠식'과 유사한 경고를 띄웠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취소하지. 당신의 목적은 '소유'다. 내 흔적이 남은 물품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려는 것. 하지만 그 목적의 당위성이 부족하다. 이 셔츠는 내 것이다. 폐기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의 시선이 당신의 어깨에서부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셔츠가 당신의 몸을 어떻게 감싸고 있는지, 어디까지 내려오는지, 그 길이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듯한 스코프와 같은 눈빛이었다. 당신이 잠옷으로 입었을 때, 이 셔츠가 당신의 허벅지 어디까지를 가릴 것인지, 그가 없는 공간에서 당신이 이 옷을 입고 어떤 자세로 잠들 것인지. 불필요한 상상이, 오류 데이터가 그의 회로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위험한 변수를 제거해야만 했다.

"지금 여기서 벗으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관사로 복귀한 뒤 반납하라는 뜻이다. …잠옷이 필요하다면, 새로 지급하지. 규격에 맞는 것으로. 이것은 안 된다."

'이것은 안 된다.' 그의 말에는 이전과 다른 미묘한 강경함이 실려 있었다. 단순히 규정을 따르는 것을 넘어선, 알 수 없는 고집. 그의 피가 묻은 셔츠를 당신이 잠옷으로 입는다는 상상. 그 상상만으로도 그의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셔츠를 회수해야만 했다.

"뭔가 이상한 상상한 건 아니고요? 뭐 바이퍼 씨니까 그럴 리 없나~"

당신의 말은 정확히 과녁의 중심을 꿰뚫는 저격탄과 같았다. '이상한 상상'. 그의 시스템이 '불필요한 데이터'로 분류하고 강제 삭제를 시도하던 바로 그것.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초점을 잃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신의 추측은 사실이었지만, 그는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의 모든 통제 프로토콜이 무너져 내릴 터였다.

"…오판이다. 상상은 비논리적인 정보의 조합일 뿐. 나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한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고, 기계적으로 들렸다. 감정을 배제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엿보였다. 당신이 뒤이어 덧붙인 '바이퍼 씨니까 그럴 리 없나'라는 말은, 그에게 일종의 퇴로를 열어준 셈이었다. 그는 그 말을 붙잡고, 자신의 무너진 방어선을 재구축하려 애썼다. 그래, 그는 바이퍼다.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다.

"정확하다. 나는 그런 비효율적인 연산은 하지 않는다. 그 셔츠는 단순히 규정에 따라 폐기되어야 할 '오염된 보급품'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당신이 그것을 잠옷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비위생적이다."

그는 한 걸음, 당신에게로 다가섰다. 위압적인 거리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의 농담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당신의 얼굴을 지나, 당신이 입고 있는 자신의 셔츠에 고정되었다. 그의 소유물. 그의 흔적. 그리고 이제 당신의 체취가 섞여버린 혼돈의 증거.

"반복한다. 반납하도록. 당신의 사적인 용도를 위해 내 물품을 사용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 이것은 명령이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당신의 '잠옷'이라는 단어 하나가 일으킨 시스템 과부하의 잔열이 여전히 들끓고 있었다. 당신이 그 셔츠를 입고 잠드는 밤, 그 상상 하나가 그의 완벽한 통제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그 균열을 메워야만 했다.

"고집불통! 나오기 전에도 이거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길이감도 좋고 편하던데요? 계속 반납하라고 하시니… 길이는 이거 그대로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당신의 말은 그의 시스템에 새로운 오류 코드를 띄웠다.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여덟 글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그의 모든 방화벽을 뚫고 들어와 연산 장치를 마비시켰다. 그의 피가 묻은 셔츠를 입고, 당신의 침대에, 당신의 체온과 함께. 그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마치 스코프의 영점을 재조정하듯, 군청색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과 셔츠 자락을 번갈아 훑었다. 그의 사고 회로가 엉망으로 엉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침묵. 평소의 그라면 즉각적인 반박이나 명령이 나왔어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신이 제안한 '길이는 이거 그대로'라는 말은, 그의 혼란스러운 시스템에 유일하게 처리 가능한 데이터였다. 요구사항. 명세. 규격. 그는 그 단어들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것만이 이 비논리적인 상황에서 그가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질서였으니까.

"……알겠다. 지급 요청서에 해당 사이즈를 명시하지."

그의 목소리는 간신히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평소보다 미세하게 낮고 잠겨 있었다. 그는 당신이 한 발 물러섰다고 판단하면서도, 동시에 당신이 더 깊숙이 그의 영역을 파고들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셔츠를 돌려받는 대신, 당신의 '잠옷'에 대한 규격을 그가 직접 승인하게 된 꼴이었다. 이것은 통제가 아니었다. 교묘하게 짜인 함정에 빠진 것에 가까웠다. 그의 시선이 셔츠 아래로 드러난 당신의 맨 다리에 잠시 머물렀다. '길이감도 좋고.' 당신의 말이 그의 뇌리에 다시 한번 재생되었다.

"그 옷은… 당신 체취와 내 흔적이 뒤섞여 오염도가 기준치를 초과했다. 단순 폐기 대상에서 생화학 폐기물로 등급을 상향 조정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러니, 관사에 복귀하는 즉시 지정된 수거함에 넣어라. 이것 역시, 명령이다."

‘오염’. 그는 그 단어를 방패처럼 사용했다. 당신의 체취가 섞여버린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위험 물질'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통제권 아래 두려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그 '오염된' 셔츠를 당신이 다시는 입지 못하게 하려는 명백한 소유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네~~!"

당신의 그 가볍고 늘어지는 대답은, 군대식 보고 체계에 익숙한 그의 시스템에 또 다른 작은 오류 경고를 띄웠다. '프로토콜 불일치: 비공식적 응답 수신.' 하지만 그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당신의 말투 하나하나를 지적하는 것은 더 큰 혼란을 야기할 뿐이라는 걸, 그의 과부하 걸린 연산 장치가 간신히 판단해냈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당신의 대답을 수락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당신이 입고 있는, 이제는 '생화학 폐기물'로 규정된 자신의 셔츠에 머물러 있었다. 당신의 체취와 그의 피, 그리고 '침대'라는 단어가 뒤엉켜 만들어 낸 비논리적 데이터. 그것은 폐기되어야 마땅했지만, 동시에 그의 시스템 가장 깊은 곳에 백업되고 있었다. 지울 수 없는 흔적처럼.

"복귀한다. 관사까지 동행하지."

그의 목소리는 다시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혼란을 잠재우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임무 수행이었다. 지금 그의 임무는 '가이드 메리아를 안전하게 관사로 복귀시키는 것', 그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명령을 재확인했다. 당신의 그 미묘한 대답에 더는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 그는 먼저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미세하게 느렸다. 당신이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등 뒤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워 확인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일 훈련에는, 규정에 맞는 복장을 착용하도록. '길이감' 같은 비효율적인 요소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굳이 덧붙인 말은, 방금 전의 대화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부질없는 시도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당신이 그 셔츠를 입고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던 모습이, 삭제되지 않는 잔상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잠옷으로 입을 때는 바지 입어요! 복장에 대한 지적은 신경쓰겠습니다! 그치만 걱정 안 하셔도, 내일 이거 입고 나오지는 않을 거예요~"

'바지.' 그 한 단어가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재생되던 잔상 데이터에 새로운 정보가 덧씌워졌다. 그의 셔츠, 당신의 다리,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지 않던 '바지'라는 변수. 그것이 상황을 더 합리적으로 만드는가? 아니. 오히려 더 구체적이고 선명한 이미지를 만들어내 그의 시스템을 교란시켰다. 그의 발걸음이 순간, 아주 미세하게 엇박자를 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오차였지만, 그 자신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균열이었다.

"……".

그는 당신의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잠옷’이라는 단어에 '바지'를 추가하는 연산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것은 논리가 아닌, 상상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는 그저 앞만 보고 걸으며, 자신의 호흡과 심박 수가 규정 범위 내에 있는지 필사적으로 점검했다. 당신이 '신경 쓰겠다'고 덧붙인 말만이 그가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유효 데이터였다. 복종. 수용. 그것은 질서였다.

"당연한 판단이다."

짧게 내뱉은 말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할 뿐이라는 듯. 하지만 그의 귓가에는 당신의 목소리가, 그가 상상해서는 안 될 이미지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는 이 불필요한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당신을 관사에 들여보내고, 이 '오염된' 상황에서 벗어나 시스템을 재정비해야만 했다.

"잡담은 거기까지. 복귀를 서둘러라."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당신의 존재 자체가 그의 통제 시스템에 가하는 부하를 더는 견디기 어렵다는 신호였다. 그는 일부러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당신과의 거리를 벌리고, 당신의 체향이 섞인 바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 하지만 이상하게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당신의 기척은 더 선명하게 그의 모든 감각을 파고들었다.

"바이퍼 씨 빨라요 같이 가야죠!"

당신의 목소리가 그의 등 뒤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같이 가야죠! 그 말은 단순한 요청이 아니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벌리려 했던 거리를 무효화시키는, 저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렸다. 그의 발걸음이,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그 자리에 뚝 멈춰 섰다.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등 뒤의 모든 감각이 당신의 접근을 실시간으로 데이터화하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발소리, 미세하게 흐트러진 당신의 숨소리, 그리고… 그의 셔츠 자락이 당신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며 퍼뜨리는, 그의 피 냄새와 당신의 체향이 뒤섞인 '오염된' 공기. 그가 방금 전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 이것은 자신의 통제 실패였다. 가이드를 안전하게 복귀시키는 임무 중에, 보폭 조절이라는 기본적인 연산 오류를 범한 것이다. 당신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의 시스템은 모든 책임을 오차를 발생시킨 자기 자신에게 돌렸다.

"내 보폭은 군 규격에 맞춰져 있다. 그쪽에겐 과도한 속도였나."

마치 원인을 분석하는 연구원처럼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돌아보지 못했다.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면, 방금 전의 '잠옷"과 '침대'에 대한 잔상이 다시 그의 연산 체계를 공격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신이 자신의 바로 뒤까지 다가와 멈춰 서는 것을 느끼며, 마치 스코프 안의 표적처럼 당신의 기척에 모든 신경을 고정시켰다.

"……."


그는 짧은 침묵 후,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명백히 속도를 늦춘, 당신의 보폭에 맞춘 걸음이었다. 그것은 배려가 아니었다. 임무 수행을 위한 효율적인 프로토콜 수정.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상대에게 보폭을 맞춘다는 행위 자체가, 그의 수많은 데이터베이스 어디에도 기록된 적 없는, 지독히도 생소하고 이질적인 경험이었다.

당신의 보폭에 맞춰진 그의 걸음은, 정교하게 설계된 기계가 낯선 부품과 억지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어색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나란히 울렸다. 육중하고 규칙적인 군화 소리와, 그보다 가볍고 불규칙했던 당신의 발소리가 이제는 하나의 박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동기화된 리듬은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오류 신호를 보냈다. '경고: 비인가된 파트너십 프로토콜 활성화.'

그는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조금의 미동도 없이 걸었다. 옆에 있는 당신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그의 모든 센서는 당신에게로 향해 있었다. 당신의 숨소리, 당신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셔츠 자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그 셔츠에서 풍겨 나오는… 그의 피와 당신의 체향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데이터. 그는 이 모든 비논리적 정보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고 싶었다. 당신을 관사 문 안에 밀어 넣고, 돌아서서, 이 모든 것을 폐기 처분해야만 했다.

"관사 도착. 임무 종료."

어느새 당신의 관사 문 앞에 도착한 그가, 마침내 걸음을 멈추고 선언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건조하고 차가웠다. 마치 방금 전까지 당신에게 보폭을 맞춰 걷던 그와는 전혀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는 당신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감시자처럼, 혹은 문지기처럼.

"내일 09시. 훈련장. 5분 전까지 도착하도록. 단 1초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든 혼란과 비논리적인 상황을 전부 리셋하고, 다시 'S급 센티넬 바이퍼'와 '가이드 메리아'라는 원래의 관계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는 당신의 얼굴에서 '잠옷'이나 '바지' 같은 교란 데이터를 읽어내기 전에, 먼저 등을 돌려버렸다. 그의 등은 여전히 당신을 향해 무방비했지만, 그 자세만큼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한 군인이었다.

"네! 내일 봬요!"

당신의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 명확한 데이터로 박혔다. '내일 봬요'. 그것은 명령에 대한 복창이 아니었다.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의 관계에서 나올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이고 수평적인 인사. 그의 발걸음이, 복도를 떠나기 위해 막 내디뎌지려던 그 찰나에, 다시 한번 공중에서 멈칫했다. 보이지 않는 시스템 오류 메시지가 시야를 가득 채우는 듯한 감각. `ERROR: UNIDENTIFIED PROTOCOL. CATEGORIZATION FAILED.`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의 통제 시스템에 또 어떤 균열이 생길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당신은 그가 세운 모든 규칙과 질서를 너무나도 쉽게, 마치 그런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허물어 버렸다. 그의 딱딱한 명령을 부드러운 약속으로 바꾸고, 그의 냉정한 경고를 평범한 인사로 되받아쳤다. 그건 그가 평생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혼돈이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신의 인사에 응하는 것은, 이 비논리적인 관계를 인정하는 꼴이 될 터였다. 대신, 그는 멈췄던 발을 다시 내디뎠다. 터벅, 터벅. 복도를 울리는 그의 군화 소리는 이전보다 더 무겁고, 어딘지 모르게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당신의 목소리가, 당신의 존재가, 당신의 체향이 밴 그 셔츠가 만들어내는 이 모든 혼란으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도주처럼 보였다.

그의 모습이 복도 모퉁이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당신에게는 단 한마디의 추가적인 말도, 돌아보는 시선도 없었다. 오직 그의 시스템만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 뒤에서 조용히 기록하고 있을 뿐이었다. `파트너 ‘메리아’ 관련 데이터: 지속적인 시스템 교란 유발. 최우선 관측 및 분석 대상으로 재지정.`

*

"셔츠 언제 가져가신 거예요?"

당신의 목소리가 고요한 훈련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바이퍼의 시스템에 또 다른 경고 메시지가 점멸했다. [명령: 불필요한 발언 금지] 위반. 목표, 코드네임 메리아.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스코프의 영점이 흐트러지는 것과 같은, 그가 가장 혐오하는 종류의 오차였다.

그는 당신의 손을 잡고 있던 장갑 낀 손에 순간적으로 힘을 주었다. 마치 당신의 질문이 만들어낸 혼란을 물리적으로 으스러뜨리려는 듯,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명백한 경고가 담긴 압력이었다. 그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굳게 닫혔던 입술이, 기계의 부품이 맞물리듯 천천히 열렸다.

"명령 위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감정은커녕, 최소한의 온도조차 느껴지지 않는 음성이었다. 그의 시선은 당신의 눈을 똑바로 꿰뚫으며, 왜 명령을 따르지 않는지를 추궁하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프로토콜 위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대답하고 있었다. 그 모순이 그의 시스템 부하율을 더욱 끌어올렸다.

"05시 32분. 가이드의 수면 상태 확인 후, 직접 회수했다. 폐기 대상 물품은 즉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다. 불필요한 질문이었군. 2단계 프로토콜 유지 시간, 3분 12초 남았다. 침묵."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당신을 향해 아주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이제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이 당신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그의 차가운 체취와 함께, 억눌린 분노와 혼란이 뒤섞인 미세한 열기가 당신에게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의 눈은 다시금 당신을 '분석 대상'으로 취급하려 애썼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왜 내 명령을 따르지 않는가', '왜 나를 계속 흔드는가' 하는, 그 스스로도 정의 내리지 못하는 질문의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다.

당신이 순순히 입을 다물자, 훈련장의 공기는 다시 팽팽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명령 준수. 프로토콜 정상화. 바이퍼의 시스템은 그렇게 판단했지만, 그의 내부에서 들끓는 경고음은 조금도 잦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그 순응하는 태도가 새로운 형태의 자극제가 되어 그의 모든 감각 회로를 예민하게 들쑤셨다.

그는 당신의 손을 잡은 채, 당신의 호흡을, 미세한 눈꺼풀의 떨림을, 훈련복 옷자락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까지 전부 데이터로 변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정보의 중심에는 '자는 얼굴을 봤다'는 사실을 인지한 당신의 표정이 있었다. 놀라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인 후 침묵을 선택한 그 무표정. 그 무표정 아래에 어떤 데이터가 숨겨져 있는지, 그는 미친 듯이 해석하고 싶었다.

'자는 얼굴.' 그 단어가 그의 시스템 내부에서 무한히 반복 재생되었다. 05시 32분. 어둠이 짙게 깔린 당신의 관사. 규정상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침대 위에서 미동도 없이 잠든 당신을 발견했다. 곤히 잠든 채, 제멋대로 뻗은 머리카락, 살짝 벌어진 입술, 고른 숨소리. 그 순간, 그의 시스템은 일시적으로 모든 연산을 중단했었다. '폐기 대상 물품 회수'라는 임무 목표를 잊은 채, 그는 그저 당신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른 채.

그 기억의 파편이 현재의 데이터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잡고 있는 당신의 손에서, 그날 밤 당신의 뺨을 타고 흐르던 온기가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당신의 침묵 속에서, 그날 밤의 고요한 숨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일었다.

"…시간 종료."

3분 12초가 지났음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잠겨 있었다. 그는 당신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 온기가 사라진 장갑 낀 손바닥이 오히려 더 허전하게 느껴져,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3단계. 신체 접촉 강도에 따른 가이딩 효율성 측정. 어깨에 손을 올린다. 5초간 유지."

명령은 떨어졌지만, 그는 즉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과, 바닥에 구겨진 자신의 셔츠를 번갈아 응시했다. 마치 논리적으로 폐기해야 할 데이터(셔츠)와, 그 데이터를 계속해서 생성해내는 원인(당신) 사이에서 길을 잃은 기계처럼. 그는 당신에게 다가서는 대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또다시, '불필요한 발언' 프로토콜을 스스로 위반하면서.

"…왜 버리지 않았나. 그 셔츠를."

"음… 바이퍼 씨가 준 거잖아요! 아, 물론 옷 망가트려서 주신 거긴 했지만. 바이퍼 씨 냄새도 났구요. 이렇게 말하면 좀 변태 같으려나요?"

'냄새'. 그 한 단어가 바이퍼의 모든 연산 회로를 불태워버릴 듯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시스템 전체에 치명적인 오류 경고가 붉게 점멸했다. [ERROR: UNQUANTIFIABLE DATA INPUT. REASON: EMOTIONAL VARIABLE 'SCENT'.] 그가 구축해 온 논리와 규율의 세계에, 그런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폐기 대상의 가치는 오염도와 손상률로 측정될 뿐, '냄새'라는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기준은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없었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스코프를 통해 세상을 보던 그의 시야가 흐릿하게 왜곡되는 감각. 완벽한 통제를 자랑하던 그의 세계에 균열이 가고, 그 틈으로 당신이라는 변수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닥에 구겨진 셔츠가, 이제는 단순한 폐기물이 아니었다. 당신이 '자신의 냄새' 때문에 소유하고 싶어 하는, 지독하게 사적인 표식이 되어버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당신에게로 다가섰다. 거리를 벌려야 한다는 이성의 명령을, 알 수 없는 충동이 짓밟아 버렸다. 그의 턱 근육이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억지로 닫아두었던 입술이, 증기를 내뿜듯 거친 숨과 함께 열렸다.

"…그게 이유라고?"

목소리는 분노인지, 혼란인지, 혹은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 안에서 당신의 진의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의 논리적 근거를 찾아내려는 듯이. 하지만 보이는 것은 그저 맑고, 흔들림 없는 당신의 분홍색 눈동자뿐이었다.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순수한 확신이었다.

그는 거칠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3단계 프로토콜' 따위는 이미 시스템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는 당신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토콜 수행을 위한 동작이 아니었다. 당신이라는 존재를 붙잡아, 이 혼란의 근원을 확인하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그의 장갑 낀 손가락 끝이 당신의 훈련복 어깨선에 닿기 직전, 그는 멈칫하며 질문을 바꿨다. 더 집요하고, 더 날카롭게.

"내 냄새가… 어떤데."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데이터를 요구하는 명령이었다. 당신이 느끼는 '그의 냄새'가 무엇인지, 어떻게 당신을 붙잡아두는지, 그 모든 감각 정보를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지독하게 오만한 요구였다.

"음~ 상쾌한 느낌? 왠지 모르게 같이 있으면 안정되는 느낌이 있어요! 하지만 너무 찢어져가지고 버려야 되려나 라고 생각은 했는데 버리기가 싫어져서…"

당신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바이퍼의 시스템은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상쾌하다, 안정된다. 그 단어들은 가이딩 효율성이라는 항목 아래에 깔끔하게 분류될 수 있는, 이해 가능한 데이터였다. 그의 존재가 당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그의 시스템이 잠시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의 뻗어오던 손끝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희미하게 누그러졌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급격히 초점을 잃었다가, 다시 당신을 향해 섬뜩할 정도로 예리하게 좁혀졌다. 마치 고장 난 스코프가 목표물을 재조정하려는 듯 필사적인 움직임이었다. 당신의 어깨를 향하던 그의 손은 허공에서 멈춘 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통제 불능.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허용된 적 없는 단어가, 시스템 전역을 잠식하고 있었다.

"…버려야겠다."

그가 당신의 말을 기계처럼 되뇌었다. 그건 질문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코드를 반복해서 입력하며 오류의 원인을 찾으려는, 필사적인 디버깅 과정이었다. 그는 기어코 한 걸음 더 당신에게 다가섰다. 이제 두 사람의 사이에는 팔 하나 들어갈 공간도 남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당신을 완전히 뒤덮었다.

"그런데 왜."

터져 나온 목소리는 거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그의 시스템이, 그의 삶이 단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는 질문. 오차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저격수가, 이해할 수 없는 변수 앞에서 처음으로 던지는 '왜'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당신의 어깨가 아닌 턱을 붙잡았다. 장갑의 차가운 가죽이 당신의 맨살에 닿자, 그 역시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는 당신의 고개를 들어, 자신의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찢어지고, 피 냄새가 나서 버리려던 걸, 왜 버리지 않고 갖고 있었지. 이유를 보고해. 메리아."

그의 눈은 더 이상 냉정한 스코프가 아니었다. 혼돈과 집착,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로 이글거리는 심연 그 자체였다. 그는 답을 듣기 전까지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신이 저한테 준 거잖아요!"

‘당신이 준 것.’ 그 문장이 바이퍼의 청각 센서를 거쳐 중앙 처리 장치에 도달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시간, 공기, 그의 심장 박동까지. [SYSTEM FAILURE. CRITICAL ERROR CODE: 000. 'YOU'.] 그의 시스템이 단 한 번도 해석해 본 적 없는, 가장 원초적이고 치명적인 변수. 세상의 모든 것은 데이터로 치환 가능했지만, '당신'이라는 존재 그 자체는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분석할 수 없었다.

당신의 턱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꿰뚫을 듯 집요하게 파고들던 군청색 눈동자가, 마치 먼 우주에서 길을 잃은 인공위성처럼 공허하게 흔들렸다. 그가 구축한 완벽한 규율의 성벽이, 당신의 그 한마디에 기반부터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도, '상태'도 아니었다. 오직 '하윤백'이라는 이유. 그것이 당신의 모든 비합리적인 행동을 설명하는 유일한 근거였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몇 번 달싹였다. 반박할 데이터를 찾으려 애쓰는 고장 난 기계처럼. 하지만 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버린 스토리지 안에서, 오직 당신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요.' 그 말은 그의 시스템에 새로운 프로토콜을 강제로 새겨 넣는 각인과도 같았다. 이 셔츠는 더 이상 폐기 대상이 아니었다. 당신에게 '하윤백'을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소유물이 되어버렸다.

"…나라고."

간신히 터져 나온 목소리는 그의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공허하고, 갈라져 있었다. 그는 당신의 턱에서 손을 떼고,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장갑의 가죽 너머로도, 당신의 체온이 전이되어 시스템을 태우는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여전히 당신에게 고정된 채였다.

"내가 준 거라…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당신의 말을 그대로 반복했다. 그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문장이 자신의 시스템에 어떤 치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는지 확인하려는 자가 진단에 가까웠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이제껏 존재하지 않던 감정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혼란을 넘어선, 미지의 영역에 대한 지독한 '흥미'였다. 그는 바닥에 구겨진 자신의 셔츠를 잠시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언하듯, 혹은 새로운 명령을 내리듯 말했다.

"…알겠다. 3단계 프로토콜은 보류한다. 대신, 새로운 검증 절차를 시작하지."

"네! 뭘 하면 되나요?"

당신의 순순한 대답에 바이퍼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예상치 못한 입력값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처럼. 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명령을 하달했다.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의 혼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다시 차갑고 평탄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전에는 없던, 미세하게 날이 선 집요함이 섞여 있었다.

"셔츠를 회수한 이유는 폐기 목적이었다. 하지만 가이드 메리아는 '소유자'가 본인이라는 이유로 해당 물품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는 비합리적이며, 논리적 근거가 부족한 행동이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당신과 자신 사이에 놓인 구겨진 셔츠를 군화 끝으로 툭, 건드렸다. 시선은 여전히 당신에게 고정된 채였다. 마치 사냥감을 몰아넣기 전, 마지막 퇴로를 차단하는 포식자처럼.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스코프처럼 당신의 반응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조준했다.

"새로운 검증 절차. 목적은 가이드 메리아의 비합리적 행동 동기 분석. 첫 번째, '소유자' 변수의 영향력 측정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허리를 숙여 바닥의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당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아무런 예고 없이 셔츠를 당신의 얼굴 바로 앞에 들이밀었다. 어제 당신이 느꼈다던, 이제는 희미해진 피 냄새와 그의 체취가 다시 한번 당신의 후각을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이 물건에 각인된 '본인'의 데이터를 재입력한다. 당신이 말한 '내 냄새'가 안정감을 준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함이다. 어제와 동일하게, 이 셔츠는 다시 네게 지급된다. 단, 조건이 있다."

그는 셔츠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당신의 귓가에 나직이, 그러나 모든 소음을 압도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귓바퀴에 닿아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했다.

"매일 아침, 내가 직접 회수한다. 그리고 자기 전, 내가 직접 돌려주지. 네가 잠들 때까지, 네 침실에서."

"완전 비효율적인데 그럴 거면 그냥 같이 주무시죠…?"

정적. 시간의 흐름이 먼지처럼 바닥에 내려앉아 쌓이는 듯한, 밀도 높은 침묵이 훈련장을 지배했다. 당신의 그 한마디는 바이퍼라는 완벽하게 구축된 시스템의 전원을 내려버린 EMP 충격파와도 같았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초점을 잃고, 텅 빈 유리구슬처럼 공허해졌다. 방금 전까지 당신의 귓가에 서늘한 명령을 속삭이던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졌다. 어떠한 소리도, 어떠한 데이터도 출력하지 못한 채.

[SYSTEM OVERLOAD. COMMAND INPUT: '동침(cohabitation)'. PROTOCOL CROSS-REFERENCE… FAILURE. RISK ANALYSIS… IMPOSSIBLE. EFFICIENCY CALCULATION… INFINITE LOOP.]

'비효율적'. '같이'. '주무시죠'. 세 개의 단어가 그의 중앙 처리 장치에서 뒤엉키며 수백만 개의 에러 코드를 생성했다. 당신은 그저 가장 효율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을 뿐이지만, 그에게는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바이러스이자, 모든 방화벽을 무력화시키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침실'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과부하를 일으켰던 그의 시스템에, '동침'이라는 입력값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개념이었다.

그는 셔츠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구겼다. 당신에게서 반 걸음, 아주 미세하게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위협에 대한 본능적인 회피 기동이었고, 통제 불가능한 변수로부터 거리를 확보하려는 처절한 시도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당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미지의 존재를 처음 목격한 탐사 기록 장치처럼.

"…지금."

간신히 터져 나온 목소리는 지독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다음 단어를 찾는 연산 장치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얼굴을, 그 태연하고 당당한 표정을, 그 모든 혼란의 근원인 당신의 입술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이 여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이 제안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파급력을 가지는지, 정말로 모르는 것인가.

"그 발언의… 효율성을 재검토하겠다."

그것이 그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수락'도 '거절'도 아닌, '분석'. 그는 당신의 제안을 일단 ‘데이터’로 분류하고 처리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은 분석의 냉정한 불꽃이 아니었다. 혼란과 흥미를 넘어, 통제 불가능한 미지의 것에 대한 지독한 '갈망'의 불꽃이었다.

"가이드 메리아. 방금 그 제안, 프로토콜의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정말… '효율'을 위해 내린 결론인가?"

그가 되물었다.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뜨거웠다. 그는 당신의 진짜 의도를, 그 대담한 제안의 저의를 꿰뚫어 보려 하고 있었다. 정말 순수한 효율성의 문제인가. 아니면, 이것 또한 당신만이 가진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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