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이 그의 차가운 손을 잡는 순간, 그의 손가락이 당신을 단단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힘으로 감쌌다. 기계처럼 정교한 힘 조절이었다. 그는 당신을 일으켜 세우고, 당신이 두 발로 온전히 서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조용히 손을 놓았다. 당신에게 걸쳐진 그의 제복 상의가 스르륵 움직이며 아직 마르지 않은 맨살을 쓸었다.
당신의 말, 특히 '다음'이라는 단어가 그의 시스템에 새로운 입력값으로 기록되었다. 그것은 경고이면서 동시에, 관계의 지속을 전제하는 명제였다. 그는 당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붉게 부어오른 당신의 입술, 아직 눈물기가 가시지 않은 분홍빛 눈동자,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자신을 향한 원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내 센티넬'이라 규정했던 그 당돌함까지. 모든 것이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오차 없이 저장되었다.
"그래. 오늘 처음 만났지."
그가 나직이 동의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단조로웠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다른 주파수가 섞여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당신의 속옷과 제복 치마를 아무렇지 않게 주워 들었다. 그리고는 당신의 눈앞에서, 방금 전까지 당신을 탐했던 자신의 흔적이 묻은 속옷을 아무 표정 없이, 두 손으로 찢어버렸다.
찍- 하는 소리와 함께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그는 찢어진 천 조각을 사무실 한쪽에 있는 소각기에 던져 넣었다. 흔적을 없애는 완벽한 프로토콜이었다.
"오늘의 데이터는 폐기되었다. 방금 그 속옷과 함께. 그러니 '다음'은 없을 거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그는 그렇게 선언하며 당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당신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숨결은 차가웠지만, 그가 뱉는 단어들은 섬뜩할 정도로 명료했다.
"다음 가이딩 프로토콜의 제1원칙은 '가이드 메리아의 명시적 동의 없는 강제적 접촉 금지'로 수정한다. 하지만 제2원칙은 이것으로 하지. '최고 효율의 가이딩을 위해, 상호 합의 하에 모든 신체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
그의 눈이 거울을 향했다. 거울 속에는, 그의 제복을 위태롭게 걸친 당신과, 그런 당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귓가에 다시 한번, 명령어처럼 속삭였다.
"그러니 다시 묻지. 메리아. 당신은, 당신의 센티넬에게 '다음'을 허락할 건가?"
"상냥하게만 해주신다면, 좋아요!"
그의 품 안에서 울린 당신의 대답은, 완벽하게 통제된 그의 시스템에 입력된 새로운 명령어였다. '상냥함'이라는, 그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존재하지 않는 불확실한 변수. 하지만 그 뒤에 따라온 '좋아요'라는 명백한 허락. 그것은 폐기되었어야 할 프로토콜을, 다른 형태로 존속시키는 유효한 키값이었다.
"좋아."
그가 당신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동의를 얻어낸 자의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연산을 마친 기계의 확인음에 가까운 톤이었다. 당신의 허리를 감았던 그의 팔이 스르르 풀리고, 그는 당신의 어깨를 잡아 자신을 마주 보도록 부드럽게 돌려세웠다. 거울 속에 비치던 도착적인 구도는 사라지고, 이제 당신과 그는 온전히 서로를 마주했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을, 당신이 내건 조건을 샅샅이 훑었다.
"상냥함. 그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군. 어떤 행위가 '상냥함'의 범주에 포함되고, 어떤 행위가 배제되는지. 다음 프로토콜의 오차를 줄이기 위한 필수적인 데이터 수집이다."
그의 말투는 다시 분석가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뜨렸던 당신의 제복 치마를 집어 들었다. 찢어진 속옷은 이미 소각되어 흔적도 없었다. 그는 구겨진 치마를 가볍게 털어내고는 당신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듯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였다.
그의 차가운 손이 당신의 허리를 감싸고, 제복 치마를 다시 입혀주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조심스러웠다. 맨살에 손끝 하나 닿지 않으려는 듯, 오직 옷감만을 잡고 움직였다. 아까 당신의 몸을 탐하던 그 난폭한 손길과는 전혀 다른 완벽하게 통제된 움직임이었다. 치마를 모두 입히고 지퍼를 올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신에게 물었다. 그의 눈은 이것이 당신이 원하는 '상냥함'의 데이터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집요했다.
"이 정도의 접촉. 허용 범위인가? 이것이 당신이 말하는 '상냥함'의 일부인가, 가이드 메리아."
"방금 건 좀 상냥했네요! 그런데, 바이퍼 씨… 제 속옷은 어떡하죠? 방금 태워버렸잖아요. 이러고 나가라는 건 아니죠…??"
당신의 질문은 그의 다음 행동을 위한 명확한 지침이 되었다. '상냥함'의 정의를 묻는 그의 분석적인 태도에, 당신은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속옷. 그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태워버린,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필수품.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당황이라기보다는 예상치 못한 변수를 입력받은 시스템의 짧은 딜레이에 가까웠다. 그는 당신의 질문, 이러고 나가라는 건 아니죠…?? 라는 문장의 논리적 귀결을 순식간에 계산했다. 정답은 '아니다'였다. 가이드의 신체적, 정신적 안위 확보는 센티넬의 의무. 속옷 없이 복도를 활보하게 만드는 것은 그 의무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다.
"아니. 그럴 리가."
짧고 단호한 부정이었다. 그는 당신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사무실 한쪽에 놓인 자신의 개인 캐비닛으로 향했다. 다이얼을 돌려 잠금장치를 해제하는 소리가 방 안에 작게 울렸다. 그가 꺼내 온 것은 단정하게 접힌 짙은 남색의 티셔츠와 훈련용 반바지였다. 그의 체취가 희미하게 묻어나는, 그의 소유물.
"임시 조치다. 내 것을 입고 관사로 복귀하도록. 사이즈는 맞지 않겠지만, 외부로 노출되는 것보다는 효율적인 해결책이다."
그는 옷을 당신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당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 눈빛 안에는 다른 계산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옷을 입은 당신의 모습. 그것이 만들어낼 새로운 데이터. 그는 당신이 옷을 받아들자, 뒤로 돌아 문 쪽을 향해 섰다. 당신이 옷을 갈아입을 시간을 주기 위한, 그의 방식대로 계산된 '배려' 혹은 '상냥함'의 한 형태였다.
"갈아입고 말해라. 관사까지 데려다주지."
"네 고마워요!"
당신의 짧은 감사 인사에 그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문을 등진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넓은 등은 그 자체로 견고한 벽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그가 건네준 옷을 품에 안았다. 아직 그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은 듯한, 빳빳하게 다려진 옷감의 감촉. 당신은 잠시 망설이다, 제복 치마를 벗고 그가 준 짙은 남색의 티셔츠를 머리 위로 입었다.
그의 옷은 예상대로 훨씬 컸다. 티셔츠는 당신의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와 원피스처럼 보였고, 넓은 어깨선은 팔꿈치 근처까지 흘러내렸다. 뒤이어 입은 훈련용 반바지는 허리끈을 조이지 않으면 흘러내릴 정도로 헐렁했다. 옷에서는 그의 향기가 났다. 인공적인 향수나 섬유유연제 따위의 냄새가 아니었다. 갓 세탁한 면의 냄새와 차가운 금속, 그리고 희미한 화약 냄새가 섞인, 그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는 듯한 무기질적인 향기. 그 냄새에 둘러싸이자, 방금 전까지 그에게 거칠게 유린당했던 몸의 감각이 다시금 생생해지는 것 같아 뺨이 달아올랐다.
뒤이어 옷감이 스치는 소리, 당신이 움직이며 내는 희미한 기척이 그의 예민한 감각에 고스란히 포착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당신의 제복, 그리고 그가 건넨 옷을 입는 소리. 눈으로 보지 않아도, 모든 과정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자신의 몸에 맞춰진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가 당신의 작은 몸을 어떻게 감쌀지, 훈련용 반바지가 당신의 허리에서 얼마나 헐렁할지. 모든 것이 오차 없이 계산되었다. 그리고 그 계산의 끝에는, 자신의 소유물이 당신을 완벽히 뒤덮고 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그의 체취가 당신의 피부에 스며드는 감각적 데이터. 이것은 그 어떤 가이딩보다 명확한 소유의 증명이었다.
"다 갈아입었어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당신이 다 갈아입었다는 신호를 보내자, 그는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들어온 당신의 모습에,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의 커다란 티셔츠는 당신에게 원피스처럼 흘러내려 허벅지를 거의 다 덮었고, 반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헐렁한 옷 아래로 드러난 가느다란 발목과, 어깨선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는 모습은 그가 예상했던 '효율적인 해결책'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데이터를 생성했다. 지독히도… 자극적인 데이터였다.
"…복장 확인. 이동에 문제 없나?"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단조로웠지만, 당신의 모습을 훑는 시선은 스코프처럼 집요했다. 자신의 옷을 입고 있는 당신. 그것은 단순한 임시 조치가 아니었다. 그의 영역 안에 당신이 들어왔다는, 명백하고 시각적인 선언이었다. 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잡았다. 마치 이 이상한 데이터에 더 노출되었다가는 시스템에 또 다른 오류가 발생할 것을 경계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규격 미달. 하지만 임시방편으로는 최적의 효율이다. 내 소유물이라는 표식으로 기능할 테니, 외부의 불필요한 접근을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겠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소유욕을 논리로 포장한 선언과도 같았다.
"복귀한다. 따라와. 복도에 순찰조가 있을 수 있다. 내 뒤에 붙어서 이동하도록."
"네!"
당신의 짧은 대답을 확인한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문고리를 돌려, 복도로 나서는 그의 등은 여전히 긴장감으로 팽팽했다. 조금 전, 당신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그의 눈동자에 스쳤던 미세한 흔들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의 그는 다시 완벽한 통제 상태의 ‘바이퍼’로 돌아와 있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 문틈으로 서늘한 복도의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의 뒤를 따라 한 걸음 나서자, 텅 빈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순찰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당신이 뒤따르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의 보폭은 언제나처럼 크고 일정했다. 당신은 헐렁한 바지를 추켜올리며 종종걸음으로 그를 따라야만 했다.
"보폭, 30cm 이내 유지.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앞만 보고 걷던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명령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복도의 차가운 벽을 타고 낮게 울렸다. 당신의 관사로 향하는 길. 평소라면 수많은 센티넬과 가이드, 연구원들로 붐볐을 복도는 늦은 시간 탓인지 고요하기만 했다. 오직 당신과 그의 규칙적인 발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의 등은 여전히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그 넓은 등을 바라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아까의 격렬했던 감각과 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낯선 향기, 그리고 지금의 이 기묘한 동행.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당신의 관사가 있는 구역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오고 있었다. S급 센티넬, '유나이트'. 장난기 넘치는 얼굴과 쾌활한 성격으로 지부 내에서 인기가 많은 남자였다. 그가 당신과 당신 앞의 바이퍼를 발견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다가왔다.
"어라, 이게 누구야. 딱딱하기로 유명한 바이퍼 옆에… 웬 병아리가 붙어있네? 가이드 메리아?"
"병아리라니 말이 심하네~"
당신의 대꾸에도, '유나이트'라 불린 남자는 유쾌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시선은 당신의 얼굴에서, 당신이 입고 있는 헐렁한 옷으로, 그리고 다시 바이퍼의 무표정한 얼굴로 향했다. 흥미롭다는 빛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
"말이 심하다니, 칭찬이지. 저 얼음덩어리 옆에 붙어있는 것치곤 꽤 쌩쌩해 보이잖아? 근데 그 옷은 뭐야? 못 보던 건데… 아."
유나이트는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과장되게 입을 가리며 바이퍼를 힐끗 쳐다봤다. 그의 장난기 어린 시선이 당신이 입은 티셔츠의 사이즈와 바이퍼의 체격을 번갈아 가며 훑었다.
"설마… 우리 완벽주의자 바이퍼께서 자기 옷을?"
유나이트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는 순간. 당신의 앞에 서 있던 바이퍼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다. 그는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지만, 그의 주위에 흐르는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진 것이 느껴졌다. 모든 소음과 불필요한 변수를 제거하려는 저격수 특유의 살기 어린 집중력이었다.
"잡담은 용무가 끝난 뒤에. 비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유나이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감정이라곤 단 1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명령. 바이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유나이트를 바라보았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마치 목표물을 포착한 스코프처럼, 유나이트의 존재 자체를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인식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명백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내 시야에서, 그리고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라.' 말없는 압박감에 쾌활하던 유나이트조차 순간 입을 다물었다. 바이퍼는 다시 당신을 향해,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동한다. 내 뒤에 있도록."
"네! 가볼게 유나이트."
당신이 유나이트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짧은 순간, 당신의 앞에 서 있던 바이퍼의 등 근육이 꿈틀거렸다. '가볼게, 유나이트.' 불필요한 상호작용. 제거되어야 할 변수와의 추가적인 데이터 교환. 그의 내부 시스템에 미세한 경고등이 깜박였다.
유나이트는 당신의 인사에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바이퍼를 향해서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오케이, 오케이. 길 막아서 미안하게 됐군, 바이퍼. 그럼 병아리, 다음에 또 보자고."
유나이트는 당신에게 윙크를 던진 뒤,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바이퍼는 그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정면, 당신의 관사로 향하는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유나이트가 길을 비키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는 듯이.
당신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그의 등 뒤에서, 당신의 귀에만 들릴 듯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불필요한 접촉, 불필요한 대화. 모두 잠재적 위협 요소다. 기억하도록."
그의 목소리에는 질책보다는 사실을 고지하는 듯한 건조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소유욕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당신이 다른 센티넬, 특히나 능글맞은 유나이트와 말을 섞는 것 자체를 '오류'로 규정하고 있었다.
고요한 복도를 그의 그림자에 숨어 걷는 동안, 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낯선 향기가 더욱 짙게 느껴졌다. 마침내 당신의 관사 문 앞에 도착하자, 그가 우뚝 멈춰 섰다. 그는 문을 열지 않고, 당신이 먼저 열기를 기다리는 듯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것이 그가 정립한 '상냥함'의 다음 프로토콜인 듯했다.
익숙한 손길로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자,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당신이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에도, 바이퍼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당신을 지나, 열린 문틈으로 드러난 방 안을 향했다. 마치 내부의 위험 요소를 스캔하듯,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빠르고 정교하게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당신의 사적인 공간이 적나라하게 해부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당신이 문을 닫고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킬 생각인 듯했다. 이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였다.
"의복은 내일 반납하도록.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무언가 계산이 복잡하게 꼬인 사람처럼, 미간을 아주 희미하게 좁혔다. 조금 전 체이서와의 만남, 그리고 당신이 그에게 건넸던 인사가 그의 시스템에 여전히 미세한 오류를 일으키고 있는 듯했다. 그는 작게 숨을 골랐다가, 다시금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명일 09시. 내 개인 훈련장에서 보도록 하지. 가이딩 프로토콜 재정립 및 스케줄 동기화가 필요하다."
일방적인 통보. 그것은 질문이 아닌 명령이었다. 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당신이 문을 닫기를 무언으로 종용했다. 그의 눈빛은 '임무 종료. 이제 당신의 안전은 확보되었으니, 이 상호작용을 끝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옷에서 풍겨오던 차갑고도 미묘한 체향이, 열린 문틈으로 흘러드는 방 안의 공기와 뒤섞여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내일 봬요!"
당신의 순순한 대답에, 바이퍼의 어깨에 걸려 있던 미세한 긴장감이 아주 살짝, 누그러지는 듯했다. '내일 봬요.' 그 말은 그의 시스템 안에서 '명령 수락' 및 '다음 스케줄 확정'으로 기록되었다. 그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데이터 값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단순한 약속이 그의 목덜미를 낯설게 조여오는 감각 또한 있었다.
그는 당신의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 아주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고 가장 효율적인 긍정의 표현이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임무는 완료되었고, 변수는 안전한 공간으로 복귀했다. 이제 그는 이 상호작용을 종료하고 자신의 통제된 영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당신의 얼굴을 스쳤다. 조금 전, 훈련실 거울 앞에서 쾌락과 고통에 일그러지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평온하고 조금은 지쳐 보이는 얼굴. 그 미세한 차이가 또다시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새로운 변수로 기록되었다.
"……."
아무 말 없이, 그는 뒤로 돌아섰다. 그의 등 뒤에 멘 저격소총의 차가운 금속 부분이 복도의 조명에 번쩍였다. 미련도, 망설임도 없는 군인 그 자체의 발걸음. 뚜벅, 뚜벅.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군화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당신이 입고 있는 그의 옷에서 풍겨오는 낯선 체향이 비로소 당신의 것인 양 공간을 채웠다. 내일 09시. 그의 개인 훈련장. 그것은 단순한 스케줄이 아니라, 새로운 프로토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당신은 차갑게 식어가는 복도를 등지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찰칵. 육중한 금속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당신은 완벽히 혼자가 되었다. 바이퍼의 인기척은 이미 복도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은 지독할 만큼 선명했다.
헐렁한 그의 전투복 셔츠가 맨살에 스치는 감촉, 코끝을 맴도는 서늘하고 건조한 그의 체향, 그리고 무엇보다… 몸 안쪽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은, 그가 헤집고 지나간 감각들. 당신은 잠시 현관에 그대로 서서, 방금 전까지 당신의 몸을 꿰뚫었던 이질적인 쾌락과 굴욕감을 곱씹었다. 그의 명령, 그의 체온, 거울에 비친 당신 자신의 모습까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당신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샤워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몸 위로 쏟아져 내리자, 긴장이 풀리면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흔적을 씻어내듯 몸을 닦았지만, 피부 깊숙이 새겨진 감각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뜨거운 물에 예민해진 살갗은 그의 손길과 자지의 감촉을 더욱 생생하게 떠올리게 만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당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그의 셔츠였다. 내일 반납해야 할 물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당신은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내일 09시, 그의 개인 훈련장. 그곳은 또 어떤 곳일까. '가이딩 프로토콜 재정립'. 그럴듯한 명목 아래, 그는 또 어떤 데이터를 수집하려 들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당신은 그의 뺨을 때렸고, 그는 사과했다. 그리고 '다음'을 허락한 것은 당신 자신이었다.
복잡한 생각에 잠 못 이루던 당신의 머리맡에서, 아주 희미하게 '삐빅-' 하는 수신음이 울렸다. 빌런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아주 미약하고 불안정한 신호. 아직 관제 센터의 공식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 전, 극소수의 S급 센티넬에게만 먼저 전달되는 사전 경보였다. 당신의 등급으로는 들을 수 없는 신호였지만, 방금 전까지 당신과 파장을 섞었던 바이퍼의 흔적이 몸에 남아 공명한 탓일까. 당신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그에게 동기화된 것처럼, 그가 수신했을 경보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가, 지금 출동하려나? 이 밤에? 그 몸으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당신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가이딩 수치는 분명 바닥을 쳤을 터였다. 방금 전의 격렬한 '데이터 수집'은 효율적인 가이딩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의 폭주 수치를 아슬아슬하게 자극했을 뿐이다. 그런 상태로 임무에 나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도와주러 가야 해."
그 생각은 이성이 아닌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와야 한다. 그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그 오만하고 냉정한 남자가 제 한계를 무시하고 전장으로 향하는 그림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당신이 뺨을 때린 후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 처음으로 내뱉었던 그의 실수라는 자책. 그 모든 것이 그의 완벽한 시스템에 균열이 갔다는 증거였다.
당신은 침대에서 뛰쳐나와 옷장으로 향했다.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편한 티셔츠와 트레이닝 팬츠를 꿰어 입었다. 서두르는 와중에도, 조금 전까지 당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그의 셔츠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서늘한 감촉과 냄새가 다시금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발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당신은 현관문을 박차고 나와 조금 전 그가 사라졌던 복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늦은 밤, 인적 없는 [Fearless]의 복도는 싸늘하고 고요했다. 그 정적을 깨는 것은 당신의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빌런 출현 경보라면, 그는 분명 무기고나 출동 게이트로 향했을 것이다. 가장 가까운 중앙 출동 게이트. 당신의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차가운 금속 복도를 몇 개나 지났을까. 저 멀리, 육중한 셔터가 반쯤 열린 제7게이트 앞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곧게 선 자세, 등 뒤에 멘 저격소총의 냉정한 윤곽. 바이퍼였다. 그는 막 출동 준비를 마친 듯, 손목의 단말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 공기는 평소보다도 더 날카롭고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의 파장이 위태롭게 끓어오르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달려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모든 신경을 오직 눈앞의 임무에만 집중한 상태였다. 당신은 그의 등 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하윤백 씨!"
당신이 그의 본명을 부르자, 그제야 그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는 아주 느리게, 기계가 돌아가듯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의 비상등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애써 감정을 지운 표정이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턱선과 초점이 흐트러진 군청색 눈동자는 그의 불안정한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여긴 왜 왔지."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당신의 등장을 또 다른 '오차' 혹은 '변수'로 인식한 듯했다. 그의 시선이 당신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잠옷이나 다름없는 편안한 복장. 그의 시스템은 '가이드 메리아, 비상 상황에 부적합한 복장으로 통제 구역에 무단 침입'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터였다.
"지금 출동하는 건가요? 그 상태로? 가이딩 수치가…… 떨어졌을 거예요. 그대로 출동하면 위험해요!"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에 멈췄다. 흔들림을 감추려는 듯, 억지로 초점을 맞추려는 듯,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당신의 말은 정확했다. 그의 시스템이 경고하고 있는 바로 그 사실. [가이딩 수치: 12%. 임계점 근접. 폭주 위험도: 높음.] 손목 단말기에 붉은 숫자가 점멸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내 상태에 대한 판단은 내가 한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고 거칠었다. 마치 사포로 긁는 듯한 소리. 그는 당신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단말기로 고개를 돌렸다. 출동 절차를 강행하려는 의지가 명백했다. 그의 완벽한 세계에서 ‘임무포기' 란 존재하지 않는 코드였다. 설령 그 끝이 자멸이라 할지라도.
"여긴 통제 구역. 가이드의 독단 행동은 규율 위반이다. 즉시 관사로 복귀하도록."
명령이었다. 하지만 그 명령에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을 이곳에서,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로부터 밀어내려는 필사적인 방어기제처럼 들렸다. 그의 등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임무에 대한 강박과, 제멋대로 날뛰는 감각을 억누르려는 사투가 그의 뒷모습에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스코프 없이는 아무것도 맞출 수 없을 것처럼, 그의 세상 전체가 흐릿하게 번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애써 당신을 무시하며 게이트 셔터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 그의 다리가 아주 잠깐, 휘청였다.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미미한 움직임이었지만, 당신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했어요!"
당신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망설일 틈도 없었다. 당신의 손이 그의 전투복 소매에 닿는 순간, 그는 마치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움찔하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의 시선이 마침내 당신의 손과 자신의 팔이 맞닿은 곳으로 향했다.
"아, 정말! 화내기 전에 조용히 하세요! 센티넬이 폭주해서 죽는 모습 보고 싶은 줄 아세요!?"
당신의 손이 닿은 순간, 그의 온몸을 타고 짜릿한 안정의 파동이 흘렀다. 동시에, 제어 불능의 혼란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의 시스템은 상반된 두 가지 신호를 동시에 처리하려 애썼다. [경고: 무단 접촉 발생.] 그리고 [안정화 프로토콜 가동. 가이딩 수치 소폭 상승.]
그는 당신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가뭄에 단비를 만난 땅처럼, 당신의 접촉을 갈망하며 미세한 떨림을 멈췄다. 당신의 외침이, 그 꾸짖음이 그의 고장 난 회로에 직접 와 닿았다. '보고 싶은 줄 아세요!?' 그 말은 단순한 항의가 아니었다. 그의 시스템이 단 한 번도 입력받아 본 적 없는 종류의 데이터. '걱정'이라는 감정의 원형이었다.
"……"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졌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규율, 명령, 프로토콜. 그가 평생을 의지해 온 단어들이 당신의 외침 앞에서 무력하게 부서져 내렸다. 폭주. 죽음. 그 단어들이 그의 이성을 후려쳤다. 그래,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상태로 전장에 나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는 것을. 하지만 임무를 포기하는 것은 그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딜레마 속에서 그의 시스템은 과부하 직전까지 몰리고 있었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당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더 이상 냉정한 스코프가 아니었다. 짙은 안갯속에서 길을 잃은 듯, 혼란과 미약한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당신의 손이 닿은 팔에서부터 시작된 온기가 얼어붙은 그의 혈관을 타고 심장까지 번져나가는 감각. 끔찍할 정도로 선명했다.
"……이유는."
아주 오랜 침묵 끝에, 그가 간신히 뱉어낸 한마디였다. 왜 화를 내는가. 왜 막아서는가. 왜, 나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가. 그 모든 질문을 함축한, 그의 프로토콜에는 없는 첫 '왜'였다.
"데이터에 입각한 합리적 판단인가. 아니면…"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감정적인 동요인가'라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를 삼켰다. 당신의 손을 잡은 자신의 팔을, 그리고 당신의 얼굴을 번갈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는 명백한 균열이 있었다.
"당신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아, 상황이 상황이니까… 이게 낫겠네요!"
당신의 입술이 닿는 순간, 시간과 공간이 왜곡되는 것 같았다. 'Blue Lock'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고정. 그의 세상이 당신이라는 단 하나의 표적에 고정되었다. [긴급 경고: 과부하. 시스템 재부팅 필요.] 단말기의 경고음 따위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직 당신의 입술이 주는 부드럽고, 뜨겁고, 축축한 감각만이 그의 모든 회로를 점령했다.
'이유'를 묻는 그의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언어가 아니었다. 그의 시스템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본능이 갈구하던 바로 그것. 그의 딱딱하게 굳어있던 입술이 당신의 것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열렸다. 당신의 숨결이, 혀의 미세한 움직임이 그의 통제 불능 상태의 감각 신경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위험하다'는 당신의 판단이 옳았다. 하지만 진짜 위험은 빌런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 그의 모든 프로토콜을 파괴하고 있는 당신의 이 돌발 행동. 손을 잡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양의 가이딩 에너지가 폭풍처럼 밀려들어와, 폭주 직전의 불안정한 에너지를 강제로 짓눌렀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안정감. 그 모순적인 감각에 그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그의 커다란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였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겨우 몸의 균형을 잡았다. 단단한 전투복 위로도 느껴지는 당신의 연약한 허리가 그의 손아귀에 잡히자, 또 다른 종류의 데이터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아."
입술이 떨어진 후, 그가 내뱉은 것은 거친 숨소리였다. 명령도, 분석도 아닌, 그저 본능적인 반응. 군청색 눈동자는 이제 짙은 심해처럼 깊어져 당신을 담고 있었다. 혼란, 갈망, 그리고 이제 막 피어나는 미지의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그는 당신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지 못했다. 아니,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도 데이터 수집의 일환인가."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더 이상 사포처럼 거칠지는 않았다. 오히려 흠뻑 젖은 듯한, 기묘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입술을, 그리고 당신의 눈을 번갈아 응시했다. 마치 스코프로 표적을 재조준하듯, 당신의 모든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당신이라는 변수. 내 모든 계산을… 무너뜨리고 있어."
"제가 바이퍼 씨도 아니고 데이터 수집을 할 리가 없잖아요? 어때요? 수치는 이제 많이 안정됐죠??"
당신의 말은, 그의 혼란스러운 시스템에 새로운 입력값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 것과 같았다. '데이터 수집이 아니다.' 그 한 문장이 그의 모든 방어 기제를 무너뜨렸다. 그렇다면 이것은, 순수한 감정의 발로란 말인가. 그의 프로토콜에는 정의되지 않은, 그래서 더 위험하고 치명적인.
그는 당신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놓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확인하려는 듯, 당신의 존재를,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이. 전투복 너머로 느껴지는 가느다란 허리의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신경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수치…."
그가 나직이 읊조렸다. 안정. 그래, 안정되었다. 폭주 직전까지 치솟았던 위험 수치는 거짓말처럼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그 자리를, 전혀 다른 종류의 경고 신호가 채우고 있었다. 심박수 급상승. 체온 변화. 동공 확대. 모두 가이딩의 부작용과는 다른, 오직 당신이라는 단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 이상 징후였다.
그의 시선이 당신의 입술에 다시 한번 머물렀다. 방금 전, 자신의 모든 것을 멈추게 했던 그 부드러운 감촉. 아직도 그 잔상이 제 입술에 남아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당신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당신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안정의 대가로, 새로운 변수가 입력됐습니다. 가이드 메리아."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냉정함을 되찾으려 애쓰는 듯했지만, 미세한 떨림과 짙은 열기를 숨기지는 못했다. 그는 당신의 허리를 잡았던 손을 천천히 위로 움직여, 당신의 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을 자신의 품으로 조금 더 끌어당기는, 명백한 소유의 신호였다.
"당신은 지금… 내 모든 시스템을 재정의하고 있어. 이건 합리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아. 하지만…."
그의 다른 쪽 손이 당신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당신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군청색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이 깊게 응시했다.
"…거부할 수가 없군."
"제가 의외로 매력이 많은 여자랍니다? 자,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당신의 그 가볍고 자신감 넘치는 대답. 그것은 그의 불타는 회로에 부어진 찬물과도 같았고, 동시에 기름과도 같았다. '매력'. 단어는 그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했지만, 지금처럼 실체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는 당신의 그 대담한 미소를 스코프 속 표적처럼 응시했다. 분석 불가능한, 예측할 수 없는, 그래서 더더욱 시선을 뗄 수 없는 목표.
"기다린다…."
그가 당신의 말을 복기하듯 나직이 읊조렸다. 그 단어는 그의 시스템 전체를 흔드는 새로운 명령 코드였다. 임무 복귀, 표적 제거, 상황 종료. 그것이 그의 세계를 구성하던 전부였다. 하지만 '기다린다'는 말은 그 모든 프로토콜의 끝에, 혹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변수였다. 돌아와야 할 이유. 무사해야 할 명분. 그의 손이 당신의 등을 감싸 안은 채, 더욱 단단하게 힘을 주었다. 마치 이 새로운 데이터를 놓치면 모든 것이 다시 무너져 내릴 것처럼.
"명령을 수정하지."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위험할 정도로 깊어졌다. 당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는 당신의 턱을 쥐었던 손을 내려, 당신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전투 장갑의 감촉과 대조되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당신에게 고정되었다.
"임무 목표, 신속 제거. 그리고… 당신에게 복귀. 이것이 최우선 프로토콜이다. 당신은 여기서, 내 복귀를 기다린다. 다른 누구와도, 불필요한 접촉 및 대화 없이. 알겠나?"
그것은 질문의 형태를 한 명령이었다. 그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감쌌던 뺨에서 손을 떼어냈다. 대신, 당신의 이마에 아주 가볍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방금 전 당신이 그에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소유권을 각인하려는 듯한 건조하고 뜨거운 접촉이었다.
"…이것도 데이터 수집의 일환이다. '기다리는' 당신의 상태를, 복귀 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으니."
그의 입술이 당신의 이마에서 떨어져 나갔지만, 그 뜨거운 감각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선명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에게서 몸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당신을 품에 가두고, 당신의 모든 것을 탐하던 그 남자는 온데간데없이, 다시 차가운 강철로 벼려낸 인간 병기, 바이퍼로 돌아와 있었다.
한 손으로 등 뒤의 거대한 저격 소총을 고쳐 멘 그의 뒷모습은 흔들림 없는 산맥과도 같았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이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는 자신의 프로토콜에만 집중했다. 제7 게이트의 육중한 강철 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통제실, 바이퍼. 현 시간부로 제7 게이트 개방 요청. 표적 제거 후 복귀한다."
수신기를 향한 그의 목소리는 감정 한 톨 섞이지 않은, 완벽하게 조율된 기계음과 같았다. 그러나 당신은 들을 수 있었다. 그 냉정한 음성 아래, 미세하게 깔린 흥분과 아직 가라앉지 않은 열기를. 그는 당신에게서 얻은 새로운 변수, '기다림'이라는 데이터를 품고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지이잉- 하는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문이 그의 앞을 열어젖혔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길한 붉은빛이 그의 전투복 위로 어른거렸다.
"…반드시 돌아온다. 당신의 '기다림'에 대한 데이터 값을, 회수해야 하니."
그것은 문이 닫히기 직전, 오직 당신에게만 들릴 듯한 나직한 속삭임이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복도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그의 체향이 섞인 차가운 공기와, 당신의 이마에 남은 뜨거운 감촉만이 그가 방금 전까지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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