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맞이하는 평화로운 휴일의 오후였다. 당신이 동기 가이드들과의 약속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대비해 옷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당신의 옷과 내 옷이 나란히 걸려있는, 우리의 4년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있는 공간. 정리는 내 오랜 습관이자, 모든 것을 내 통제 하에 두려는 본능의 발현이었다. 당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당신의 물건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옮기던 중, 옷장 깊숙한 곳에 놓인 작은 상자가 손에 잡혔다. 당신의 취향이 묻어나는, 아기자기한 상자였다. 호기심보다는 정리의 일환으로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당신의 흔적이 담긴 여러 잡동사니와 함께, 옅은 분홍색의 앨범 하나가 들어있었다.

앨범 표지에는 당신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내 첫사랑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다섯 글자를 인식하는 순간, 내 모든 사고 회로가 일순간 정지했다. 심장이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물리적인 감각. '첫사랑들'. 복수형. 내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변수였다. 며칠 전 당신이 장난으로 불렀던 '하윤백 씨'라는 호칭이 불러왔던 혼란과는 차원이 다른, 근원적인 위협 신호가 시스템 전체를 뒤흔들었다. 당신의 과거. 내가 알지 못하는, 당신의 마음에 새겨졌을지도 모를 다른 남자들의 존재 가능성. 스코프 너머로 적을 조준할 때처럼 숨을 죽였다. 떨리는 손으로, 마치 기폭장치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앨범의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하고도 낯선 내 자신의 모습이었다.

첫 번째 사진. 4년 전, 우리가 처음 파트너가 되었을 무렵의 나였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각 잡힌 제복을 입고, 무감정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 아마 누군가 몰래 찍은 듯한, 딱딱하기 그지없는 사진이었다. 나는 사진 속의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저때의 나는 당신을 그저 'A급 가이드 메리아'로만 인식했지. 감정 없는 기계, 살아있는 저격 프로토콜. 당신의 분홍색 눈동자에 비친 저 차가운 남자가 당신의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다음 장으로 손을 옮겼다.

두 번째 사진은 임무 중 찍힌 것이 분명했다. 폭우 속에서, 저격소총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어딘가를 경계하는 내 뒷모습. 전투복은 흠뻑 젖어있었고, 목덜미에는 능력 발현 시 나타나는 푸른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은 이때 내 등 뒤에서, 이런 나를 보고 있었던 건가. 온 신경을 적에게 집중하느라 당신이 어떤 표정으로 나를 지켰는지 단 한 번도 인지하지 못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당신은 이 위험하고 날 선 모습마저 사랑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인가. 사진의 가장자리가 살짝 닳아있는 것을 보니, 당신이 이 사진을 꽤나 오랫동안 소중히 여겼음이 분명했다. 심장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마지막으로 넘긴 페이지에는, 가장 최근으로 보이는 사진이 붙어있었다.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서툰 솜씨로 요리를 하는 내 옆모습. 밀가루가 뺨에 묻은 줄도 모르고 미간을 찌푸린 채 계량컵의 눈금에 집중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진의 여백에, 당신의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바보남편♡'. 나는 그 글자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었다. 과거의 냉혈한 센티넬 바이퍼와 현재의 '바보남편' 하윤백. 당신은 그 모든 시간 속의 나를, 전부 '첫사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앨범을 펼치기 전 나를 잠식했던 차가운 불안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형용할 수 없는 충족감과 벅찬 감정이 가득 채웠다. 당신의 모든 처음이 나였다는 사실. 당신의 세계가 오직 나로만 채워져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

"…정말이지. 당신은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는군, 아내."

나는 앨범을 조심스럽게 덮어 상자 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는 거실 창가에 서서 당신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았다. 곧 당신이 웃으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내게 안기겠지. 그러면 나는 오늘 발견한 이 비밀을, 당신의 '첫사랑들'에 대한 감상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아마 나는, 당신을 품에 가득 안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당신의 모든 첫사랑이 나여서, 영광이다. 그리고 앞으로 당신의 마지막 사랑 또한, 나일 수밖에 없겠군."

"다녀왔어~~!!"

창가에 서서 당신이 돌아올 길목을 바라보던 나는, 익숙하고도 경쾌한 당신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당신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앨범을 보며 벅차게 차올랐던 감정이 다시 한번 심장을 가득 채웠다. 평소라면 조용히 왔어, 라고 대답하며 당신을 맞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성큼성큼 당신에게로 다가가, 외투를 벗을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와락 끌어안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힘이 실린, 당신을 내 품 안에 온전히 가두려는 듯한 포옹이었다.

"…왔어, 아내."

당신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당신에게서 풍겨오는, 익숙하고도 포근한 향기가 방금 전까지 나를 뒤흔들던 모든 감정을 부드럽게 잠재웠다. 당신의 '첫사랑들'을 모두 마주하고 난 뒤라 그런지, 당신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대적으로 느껴졌다. 한참 동안 당신을 놓아주지 않고 안고 있다가, 나는 천천히 몸을 떼고 당신의 두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내 눈동자에 오롯이 담긴 감정을 당신이 읽을 수 있도록, 그 분홍색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오늘… 옷장을 정리하다가, 당신의 아주 중요한 비밀을 발견했다."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가 당신의 뺨에 차갑게 닿았다. 조금 전 내가 마주했던 그 다섯 글자, 내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던 그 단어들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지금 내 목소리에는 질투나 불안이 아닌,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충족감이 깃들어 있었다.

"당신의… '첫사랑들'에 대한 보고서였지. 전부 확인했다."

"…어? 봤어!?"

당신의 작은 탄성과 함께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나는 흥미롭게 관찰했다. 당황으로 커다래진 분홍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방금 막 비밀 작전을 들킨 신입 요원 같았지. 하지만 내게는 그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뺨을 감싼 손의 엄지손가락으로, 뜨거워진 당신의 살결을 부드럽게 쓸었다.

"응. 전부, 아주 꼼꼼하게 확인했다. 당신의 그 대단한 '첫사랑들' 말이야."

내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걸렸다. 앨범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서늘한 불안감은 이제 흔적조차 없었다. 지금 내 심장을 채우는 것은 오직 당신을 향한 사랑과, 당신의 세계가 온전히 나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절대적인 만족감뿐이었다. 나는 당신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목소리에는 장난기와 함께, 숨길 수 없는 애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딱딱한 제복을 입은 무뚝뚝한 센티넬부터, 밀가루를 묻히고 있는 지금의 바보 남편까지… 전부 내 사진이더군. 한 명도 빠짐없이. 당신의 모든 첫사랑이 나라는 사실, 꽤 감동적인 보고였어.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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