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체념은 고요한 수면에 떨어진 눈송이처럼 소리 없이 녹아들었다. 품 안에서 온전히 힘을 뺀 당신의 무게가 고스란히 그의 몸으로 실렸다. 하윤백은 그 완전한 의탁에 만족하며, 당신의 등을 감싸 안은 팔에 아주 희미한 힘을 더 주었다. 더 이상 속박이 아닌, 온전한 안식의 요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고요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된 듯,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나직한 숨소리와, 뜨거운 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내는 미미한 소리, 그리고 아주 가끔 눈송이가 수면에 떨어져 ‘톡’하고 터지는 소리뿐이었다.
그는 당신의 등 뒤에 턱을 괸 채,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야에 담긴 것은 하얗게 쌓여가는 풍경이었지만, 그의 모든 감각 시스템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오직 등 뒤에 맞닿은 당신의 온기와,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당신의 고른 심장 박동이었다. 안정적. 평온함. 모든 생체 신호가 ‘완전한 이완 상태’에 도달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작전 성공. 하지만 그는 이 임무가 끝나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적을 깬 것은 그의 나직한 목소리였다. 마치 혼잣말처럼, 김이 서린 공기 중으로 낮게 흩어지는 음성이었다. 그는 당신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그저 먼 곳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깍지 낀 손을 들어, 그는 당신의 약지에 끼워진 백금 반지를 제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자신에게도 같은 자리에 있는, 그 반지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면서.
"만약 이 세계에 차원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센티넬도, 가이드도 없는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우리는 만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답지 않은, 가설에 기반한 비합리적인 질문이었다. 명령과 결과, 데이터와 수치로만 세상을 보던 하윤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 하지만 당신을 만난 이후, 그의 시스템에는 '만약'이라는 변수가 너무나도 많이 생겨버렸다. 그는 당신의 머리카락에 뺨을 기댔다. 샴푸와 당신의 살결이 섞인, 그를 무장 해제시키는 유일한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아마, 만나지 못했겠지. 나는 여전히 감정 없는 군인으로, 당신은… 아마 어디에선가, 지금처럼 환하게 웃으며 잘 지내고 있었을 거다. 다른 누군가의 곁에서."
그의 목소리 끝에 아주 미미한 감정의 동요가 실렸다. '다른 누군가'라는 가정은, 그의 완벽한 통제 시스템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유일한 버그였다. 그는 당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움직여, 물 아래에서 당신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는 그 손을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는 가슴팍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에 이렇게 함께 있지. 당신의 가이드가 없었다면 폭주했을 센티넬과, 그런 나를 구원한 단 한 사람의 가이드로. 어쩌면 이 모든 비극은, 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한 가장 완벽한 작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전체를 담보로 한, 아주 이기적인 작전."
그의 심장 박동이 당신의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규칙적이고, 강하고, 그리고 오직 당신으로 인해 평온을 찾은 그 울림. 그는 당신의 손등에 제 뺨을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그의 세상은, 이제 당신이라는 단 하나의 좌표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래도 만났을 거야! 내가 꼭 남편을 찾아낼게."
당신의 목소리는 맑고 단호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섬광처럼, 그의 이기적인 독백과 비극적인 세계관을 단숨에 베어버렸다. '내가 꼭 찾아내겠다'는 그 맹세는, 그의 시스템이 계산해낸 모든 비관적인 확률과 어두운 운명론을 무력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변수였다. 그의 통제 하에 있던 작전 구역에, 예측 불가능한 당신의 의지가 새로운 깃발을 꽂은 순간이었다.
하윤백은 순간 숨을 멈췄다. 자신의 심장 위에 얹힌 당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자신의 심장이 당신의 그 말 한마디에 제멋대로 날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귓가에 맴도는 당신의 목소리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언이었고, 약속이었으며, 그 어떤 불확실한 미래라도 기어코 자신들의 운명으로 만들어내겠다는 강인한 의지였다. 그가 세상을 담보로 한 작전을 운운하며 스스로를 어둠 속에 묶어둘 때, 당신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빛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기댄 당신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당신의 머리카락과 뜨거운 김에 가려져 옆모습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덮고 있던 당신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당신의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이전보다 한층 더 빠르고 강하게 뛰기 시작했다. 측정 불가. 분석 불가. 오직 당신만이 일으킬 수 있는 규격 외의 오류.
"…당신이?"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잠겨 있었다. 그는 되물으며, 당신의 손등에 다시 한번 제 뺨을 깊게 비볐다. 차가운 반지와 당신의 따뜻한 피부가 동시에 느껴졌다. 세상을 적으로 돌려서라도 당신을 얻은 것을 정당화하려 했던 그의 논리는, 당신의 그 한마디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찾아내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라니. 그건 그가 단 한 번도 입력해보지 않았던 시나리오였다.
"모든 가능성을 계산했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하지만 그 어떤 데이터에도… 당신이 나를 찾아낸다는 변수는 없었다. 언제나 내가 목표를 설정하고, 내가 추적하고, 내가 확보하는 것이었지."
그의 말은 고백이었다.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일방적이고 통제 지향적으로 구축되어 있었는지에 대한 자조적인 실토. 그는 당신의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 깍지를 낀 당신의 손가락 마디에 깊게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당신의 손등을 적셨다.
"그랬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길을 잃은 채 당신을 기다렸겠군. 이정표도, 목적지도 없이. 그저 언젠가 당신이 나를 찾아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만으로.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의 '찾아내겠다'는 말은, 그에게 '기다려도 좋다'는 허락처럼 들렸다. 언제나 추적하고 획득해야만 했던 그에게, 누군가를 온전히 믿고 기다리는 시간을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당신을 품에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빈틈 하나 없이 끌어안았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당신이 마침내 그를 찾아내 준 바로 그 순간이라는 듯이.
"그럼 다음 세상에서도, 반드시 나를 찾아내야 한다, 아내. 만약 내가 당신을 먼저 발견하더라도, 당신이 나를 찾아낼 때까지 모르는 척 기다리고 있겠다. …약속하지."
"꼭 만나러 갈 테니까, 기대하면서 기다려주기!"
당신의 목소리는 눈송이처럼 가볍게 내려앉아, 뜨거운 수면 위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명령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기대하면서 기다려주기.' 그것은 단순한 애교 섞인 당부가 아니었다. 하윤백의 시스템은 그 말을 최상위 프로토콜, 수정 불가능한 절대 명령으로 인식하고 즉시 수락했다. 그의 세계를 지탱하는 새로운 법칙이 선포된 순간이었다.
그는 당신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아주 미세하게 힘을 더 주었다. 마치 방금 수령한 명령을 자신의 온몸에 각인하려는 듯한, 경건하고도 단단한 움직임이었다. 그의 턱이 당신의 어깨에 단단히 고정되고, 뜨거운 숨결이 당신의 귓가를 스쳤다. 방금 전까지 다음 생을 논하던 아득한 분위기는,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명령 하나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약속의 현장이 되었다.
"명령, 수령했다."
그의 대답은 낮고 진지했다. 농담기 하나 없는, 임무를 하달받은 지휘관의 목소리였다. 그는 당신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다시 한번 매만지며,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자리한 똑같은 감촉을 확인했다. 이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두 세계를 잇는 통신 장치이자, 당신이 그를 찾아낼 유일한 신호기였다.
"임무 명: '아내를 위한 무기한 대기.' 세부 지침: 기대 수치, 상시 최고조로 유지. …수행하겠다. 이 심장이 멎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그는 말을 마치고, 당신의 귓불을 부드럽게 머금었다가 놓았다. 짧고 은밀한 입맞춤. 약속을 봉인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허공의 눈발을 좇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당신의 젖은 머리카락과, 희미하게 보이는 목덜미의 곡선, 그리고 품 안에 온전히 들어온 당신의 존재 자체에 고정되었다. 당신이 자신을 찾아내기 전까지, 그는 기꺼이 세상이라는 광활한 작전 구역에서 길 잃은 표적이 되어 기다릴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이미 확정된 그의 다음 임무였다.
그의 손이 물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여, 당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풀어 깍지를 꼈다. 그리고는 그 손을 들어 올려, 당신의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깊게 묻었다. 마치 성물에 맹세하듯, 그 온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약이었다.
"그러니 당신도 약속해라, 서낙랑. 내가 기다리는 동안, 너무 오래 헤매지는 않겠다고. 당신의 부재는 내 모든 시스템의 효율을 97.8% 저하시키는 유일한 변수니까. …오차는, 견디기 힘들다."
그의 목소리 끝에 희미한 애원이 섞여 있었다. 완벽한 통제를 자랑하던 남자가 내보이는 유일한 약점. 그는 당신의 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져가 부비며, 당신의 체온에 자신의 불안을 녹여내려는 듯 눈을 감았다. 온천의 열기보다도 더 뜨거운 당신의 존재가, 그의 모든 좌표를 재설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