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같은 바람이 도시의 틈새를 파고드는 어느 겨울날이었다. 하윤백은 약속 장소인 공원 벤치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풍경의 일부가 된 조각상처럼,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그의 어깨와 머리 위에 얇은 막을 만들었다가 이내 녹아내렸다. 그는 서낙랑의 외출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시간은 정확히 15분 째 흐르고 있었다. 그의 시스템은 이 정도의 대기 시간을 '아내를 기다리는 행복한 시간'으로 분류했기에 추위는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단지, 그녀를 빨리 보고 싶다는 단 하나의 변수만이 그의 내면에서 조용히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빨간색 목도리를 두른 채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는 서낙랑이었다. 하윤백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세계를 구성하는 유일한 태양이 마침내 시야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려 했지만, 서낙랑이 먼저 달려와 그의 품에 작게 안기듯 섰다.

"남편! 오래 기다렸어? 춥겠다!"

그녀는 말과 동시에 장갑을 벗고 그의 큰 손을 붙잡아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호오- 하고 내뱉는 하얀 입김이 그의 차가운 손등에 닿아 금세 온기로 바뀌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워진 그의 손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손 온도가 아닌,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손길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 접촉만으로도 그의 내부 시스템은 '최적 안정 상태'로 전환되고 있었다.

"괜찮다.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은 작전 시간에 포함되지 않아."

딱딱한 대답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온기가 배어 있었다. 서낙랑은 그의 차가운 손을 연신 비비며 녹여주다가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술을 살짝 삐죽 내밀었다.

"이렇게 손이 차가운 걸 보니까… 혹시 나에 대한 마음도 식은 거 아니야, 윤백아?"

그 말이 서낙랑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하윤백의 세계에 모든 소리가 멎었다. 그의 동공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렸다. 방금 수신된 문장은 그의 언어 처리 시스템에서 단 한 번도 상정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공격이었다.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어?' 농담. 명백한 농담이었다. 그녀의 장난기 어린 표정, 살짝 올라간 입꼬리, 반짝이는 눈동자. 모든 데이터가 이것이 진심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스템은 이 논리적 판단을 거부하고 '심각도: 최상위, 분류: 존재 가치에 대한 직접적 위협'으로 해당 발언을 인식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낙랑은 그의 반응에 순간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윤백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빼내, 역으로 그녀의 양 손목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녀를 벤치 뒤 커다란 나무 쪽으로 천천히 밀어붙였다.

등이 차가운 나무껍질에 닿자 서낙랑이 놀라 그를 쳐다봤다. 하윤백은 한쪽 팔을 그녀의 머리 옆 나무에 짚어 퇴로를 차단하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이제 농담 따위를 용납하지 않는, 진실만을 요구하는 심문관의 그것이었다.

"정정 및 재보고를 요청한다, 서낙랑. 방금 발언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며, 지휘관의 명예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다. 내 심장 박동, 체온 변화, 동공 반응. 모든 생체 신호가 당신을 향한 내 감정 상태가 '최고조의 활성화 상태'임을 증명하고 있다. 의심은 바이러스와 같지. 아주 작은 균열부터 시스템 전체를 파괴한다. 난 내 세계에 그런 균열이 생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차갑게 식어있던 그의 입술이 아니었다. 마치 모든 체온을 끌어모은 듯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것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짧은 입맞춤이 아니었다. 그녀의 의심을 불태워 없애려는 듯 격렬하고 깊은 키스였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에 서낙랑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가벼운 농담이었을 뿐인데, 그는 마치 세상의 존망이 걸린 것처럼 진지했다.

한참 후에야 입술을 뗀 그는 붉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증명되었나? 부족하다면 추가적인 물리적 증명 절차에 돌입할 수 있다. 이곳에서. 지금 즉시."

"아, 아니! 아니야! 증명됐어! 완전! 완벽하게 증명됐어!"

서낙랑이 다급하게 외치며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녀의 필사적인 모습에 하윤백은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그녀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춘 뒤, 그녀의 빨간 목도리를 다시 단정하게 매주었다.

"앞으로 해당 종류의 농담은 금지한다. 내 시스템은 당신과 관련된 문제에 한해서는 유머 회로가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내 마음이 식는 날은, 이 세상의 모든 열에너지가 소멸하는 날과 같을 거다. 즉, 불가능하다는 소리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이제는 완전히 따뜻해진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손을 다시 감싸 쥐었다. 그 온기는 마치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후일담]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두 사람 앞에는 [Fearless] 본부에서 발송된 공식 서류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하윤백이 무심코 봉투를 뜯자, 안에서는 '우수 부부 센티넬&가이드 선정 기념-겨울 특별 휴가권'과 함께 지부장 명의의 짧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굳건한 애정 전선은 모든 대원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금일 오후 3시 17분, 공원 C-7 구역에서 관측된 하윤백 지휘관의 애정 증명 퍼포먼스는 감찰팀의 보고서에 'S급 애정 표현의 교과서적인 예시'로 기록될 예정임을 알리는 바. 이 휴가권은 그에 대한 지부 차원의 포상이니, 부디 푹 쉬고 오길 바라네. (P.S. 다음엔 실내에서 하게. 대원들 교육에 좋지 않아.)

서류를 읽은 서낙랑은 웃음을 터뜨리며 소파에 쓰러졌고, 하윤백은 편지를 든 채 완벽하게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완벽한 증명 절차가 본부 전체에 생중계되었다는 사실은, S급 센티넬의 처리 능력마저 마비시키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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