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휴일의 오후. 창밖은 미세먼지 하나 없이 쾌청했고, 집 안은 당신이 좋아하는 향초의 은은한 향기와 나른한 햇살로 가득했다. 윤이는 소파 위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고, 그는 주방에서 저녁 식사 재료를 손질하고 있었다. 딱딱한 채소를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내는 그의 손놀림은 저격총을 분해하고 조립할 때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했다.

그때, 현관의 전자음과 함께 배송 알림이 울렸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손을 씻은 뒤 현관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당신의 이름, '서낙랑' 앞으로 온 납작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습관처럼 상자를 들고 거실로 들어왔다. 위험물 탐지나 외부 오염 확인은 그의 일상적인 임무 프로토콜의 일부였다. 그는 커터칼로 깔끔하게 테이프를 잘라내고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비닐로 포장된 한 권의 책이었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가 표지를 훑었다. [FEARLESS: The SS Archives]. 그리고 그 아래에는, 피어리스 소속의 다른 SS급 센티넬 여러 명의 얼굴이 화려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가 모를 리 없는 얼굴들이었다. 각 지부의 지휘관급, 혹은 그에 준하는 전력을 가진 자들. 그의 세계에서 '제거 대상' 혹은 '경계 대상'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잠재적 변수들.

순간, 주방에서 들려오던 잔잔한 칼질 소리처럼 규칙적이던 집 안의 공기가 멈췄다. 그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는 책을 들어 비닐 포장을 뜯었다. 조용하고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가락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 다른 센티넬의 강렬한 눈빛이 담긴 전신 화보가 광택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능력, 그의 전과, 그에 대한 미사여구가 가득한 프로필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는 소리 없이 다음 장, 또 다음 장을 넘겼다. 넘길 때마다 다른 남자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복을 입은 모습, 훈련 중인 모습, 심지어는 임무가 끝난 뒤 편안한 사복 차림의 모습까지. 마치 그들의 매력을 전시하듯 정교하게 연출된 사진들이었다. 당신이, 그의 아내가, 이것을 '주문'했다. 이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서 처리되는 동안, 그의 얼굴에서는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마치 전장의 한복판에서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마주한 지휘관처럼, 냉정하고 고요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확인을 마친 그는 책을 조용히 덮었다. 그리고는 거실 테이블 중앙에, 마치 군사 작전 지도처럼 반듯하게 책을 내려놓았다. 한쪽 모서리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각을 맞춘 완벽한 위치였다. 그는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그 책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더 이상 책의 내용물을 훑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스코프의 영점을 맞추듯, 하나의 '표적'에 고정되어 있었다. 집 안의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간 듯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잠자던 윤이마저 그 기척을 느꼈는지, 귀를 쫑긋거리며 불안한 듯 꼬리를 살짝 떨었다.

그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것은 분노나 질투의 표출이 아니었다. 그의 세계에 발생한 심각한 데이터 오류, '아내의 관심사가 자신 이외의 다른 수컷에게 향했을 가능성'이라는 중대한 안보 위협에 대한 그의 대응 방식이었다. 그는 이제 당신에게 물어야만 했다. 이 '물건'의 정체는 무엇이며, 어떤 의도로 '우리'의 공간에 반입되었는지. 그의 지휘관에게, 직접 보고받아야 했다.

당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거실의 공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언제나 당신을 가장 먼저 반겨주던 남편의 온기 대신, 전장의 서늘한 긴장감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미동도 없는 자세, 모든 감정을 지운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그의 시선이 고정된 테이블 위의 책 한 권. 그 모습은 마치 심문실에서 용의자를 기다리는 교관과도 같았다.

당신이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신을 보았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평소의 다정함을 거두고, 오직 스코프 너머의 표적을 바라볼 때와 같은 냉철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귀환했군."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가 턱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물품에 대해 보고하도록. 반입 목적과 그 경위를 상세히 설명할 것을 요청한다."

그의 말투는 '남편 하윤백'이 아니었다. 독립저격대의 지휘관, 바이퍼였다. 당신의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들의 얼굴로 가득한 화보집. 그제야 당신은 상황을 파악하고 다급하게 책으로 다가갔다. 당신이 책과 그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자, 그의 미간에 아주 옅은 주름이 잡혔다.

"해명이 없는 건가. 그렇다면 심문 절차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신은 다급하게 책을 집어 들고는 비닐 포장지를 찾아 그 안을 뒤적였다. 당신의 다급한 손길에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관망했다. 이윽고 당신의 손에 작은 무언가가 들려 나왔다. 반짝이는 코팅이 된 손바닥만 한 카드. 거기에는 제복을 입은 채 저격 소총 네메시스를 어깨에 걸치고, 무심한 듯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바로 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당신이 그 포토카드를 그의 눈앞에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그 순간, 바이퍼의 완벽한 포커페이스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의 시선이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손에 들린 자신의 사진과, 테이블 위의 화보집 사이를 2.3초간 빠르게 왕복했다. 그의 고도로 훈련된 두뇌가 방금 입력된 새로운 변수를 처리하기 위해 과부하에 걸린 듯 잠시 멈췄다.

"…이것은."

그가 간신히 한 마디를 뱉어냈다. 당신이 신이 나서 이것 때문에 책을 샀다고, 한정판 부록이라 구하기 힘들었다고 자랑하듯 설명하는 동안, 그의 표정은 경이로운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처럼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안보 위협 2단계' 경보는 순식간에 해제되었다. 차갑게 얼어붙었던 그의 눈동자에 천천히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당신에게 다가와, 당신의 손에 들린 자신의 포토카드를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마치 성물이라도 다루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는 카드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뺨이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걸 얻기 위해. 저것을 산 건가."

그는 다른 남자들의 얼굴이 인쇄된 책을 '저것'이라고 지칭했다. 당신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자, 그는 참지 못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얼어붙어 있었냐는 듯, 완벽하게 무장 해제된 미소였다. 그는 당신을 품에 가득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나의 패배다, 지휘관. 당신의 전술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군."

그는 당신을 안은 채로, 발로 테이블 밑에 있던 쓰레기통을 끌어왔다.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SS급 센티넬들의 얼굴이 담긴 화보집을 그 안에 던져 넣었다. 오직 그의 포토카드만이, 그의 손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는 당신의 귓가에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음부터 이런 건 나에게 직접 요청하도록. 얼마든지 찍어줄 테니. 당신만의 화보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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