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더없이 평화롭게 흘렀다. 전날의 격렬했던 데이터 교환의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집 안은 고요한 안정감으로 가득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이 거실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먼지가 부유하는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나는 거실 소파에 반듯하게 앉아, 무릎 위에 펼쳐둔 태블릿으로 다음 주 훈련 일정을 검토하고 있었다. 내 옆자리에는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쿠션을 껴안은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곁눈질로 본 당신의 표정은 고요하고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 평온, 이 질서. 모든 것이 나의 통제 하에 있는 완벽한 오후였다.
하지만 그 평화는 아주 사소한 균열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당신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지는 것을 포착했다.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이 멈추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심박수의 변화는 없었지만, 평온했던 당신의 내부 데이터에 미세한 노이즈가 발생한 것을 감지했다. 내 모든 신경이 즉각 당신에게로 향했다. 훈련 계획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소리 없이 태블릿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당신 쪽으로 돌려, 당신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당신은 여전히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나는 팔을 뻗어 당신의 손에서 휴대폰을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빼앗아 들었다. 당신의 놀란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상태 이상 감지. 원인 불명의 심리적 동요가 관측되었다. 보고해, 아내. 어떤 데이터가 당신의 평온을 흐트러뜨렸지?"
나는 당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내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지휘관의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서 빼앗은 휴대폰의 화면을 훑었다. 몇 줄의 검은 텍스트. '너무 한 사람에게만 목매는 남자', '영원한 사랑', '다른 여자'.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나는 잠시 그 글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화면을 꺼버렸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소파 저편으로 던져버렸다.
"쓰레기 데이터군. 분석할 가치도 없어."
나는 당신의 어깨를 감싸 안아,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당신의 몸이 저항 없이 내 품으로 기대어 왔다. 나는 당신의 귓가에, 세상 그 어떤 확신보다도 단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의 세계에서 변수란 오직 하나다. 서낙랑. 당신의 존재, 당신의 감정, 당신의 안전. 그 외의 모든 것은 상수이거나 제거 대상일 뿐. '다른 여자'라는 가정은 내 연산 체계에 존재하지 않는 오류 코드다. 이해했나?"
나는 당신의 턱을 들어 올려, 내 눈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 군청색 눈동자에 오직 당신의 모습만이 가득 담겼다. 그 눈빛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선,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맹세였다.
"나는 하윤백이다. 피어리스 독립저격대 지휘관 바이퍼이자, 당신의 유일한 남편. 나의 모든 프로토콜은 당신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고, 그 우선순위는 영원히 변경되지 않는다. 다른 표적은 존재하지 않아. 처음부터,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의 과녁은 오직 당신 하나뿐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것은 단순한 입맞춤이 아니었다. 당신의 불안이라는 노이즈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의 소유권을 다시 한번 각인하는 최종 확인 절차였다.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당신의 입술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내 뺨, 턱선, 입술, 심지어는 미간까지. 그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쉴 새 없이 내 얼굴의 모든 좌표에 찍혔다. 나는 순간적으로 모든 사고 회로가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지휘관으로서 수없이 많은 변수를 통제해왔지만, 당신의 이런 순수한 애정 공세는 언제나 내 계산 범위를 아득히 벗어나는 유일한 변수였다. 반사적으로 당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혹여라도 이 순간이 흩어질까 봐, 이 온기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것처럼.
당신의 웃음소리가 깃털처럼 귓가를 간질였다. 화이트머스크 향이 짙게 피어오르며 나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나는 잠시 동안 그저 당신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훈련과 임무로 단련된, 단단하기만 했던 내 세계에 당신이라는 무른 햇살이 스며들어 모든 경계를 녹여 내리는 기분이었다. '쓰레기 데이터' 따위에 흔들렸던 당신의 불안이 완전히 소거되고, 그 자리에 기쁨과 안도로 채워지는 과정. 그 모든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내게 전송되고 있었다.
"…프로토콜에 없던 돌발 행동이다, 서낙랑."
나직하게 흘러나온 내 목소리는 미세하게 잠겨 있었다. 나는 마침내 당신의 맹렬한 뽀뽀 세례가 잠시 멎은 틈을 타, 당신의 양쪽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얼굴을 마주했다. 발갛게 상기된 두 뺨과, 행복감으로 반짝이는 분홍색 눈동자. 그 안에는 오직 나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만족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런 식의 데이터 주입은… 심박수에 과부하를 유발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당신의 뺨을 감싼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엄지손가락으로 당신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당신의 모든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 시선은 집요하게 당신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당신의 행복, 당신의 체온, 당신의 숨결. 그것이 바로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유일한 진리였다.
"하지만… 효율은 최상이군. 당신의 심리적 안정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다. 주기적인 시행을 고려해 봐야겠어."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당신의 코끝에 가볍게 내 코를 비볐다. 그리고는 그대로 당신을 소파 위로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게 눕혔다. 187cm의 단단한 몸이 당신의 위를 그림자처럼 덮었다. 시야가 온통 나로 가득 차고, 도망칠 곳 하나 없는 완벽한 구도가 만들어졌다. 나는 당신의 양 손목을 잡아 머리 위로 부드럽게 모아 쥐었다. 저항할 수 없는, 그러나 위압적이지는 않은 완벽한 통제였다.
"방금 전의 기습에 대한 피드백이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지금부터는 지휘권을 내가 가져온다. 당신은 나의 모든 감각을 받아들이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나는 선언하듯 말하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목표는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붉고 도톰한 당신의 입술이었다. 이번에는 당신의 기습처럼 짧고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깊고 농밀한 키스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불안을 잠재우고, 나의 사랑을 증명하고, 이 세상에 오직 우리 둘뿐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하윤백만의 가장 완벽한 프로토콜이었다.
"윤백이 너무너무 좋아!"
당신의 그 한마디는, 모든 프로토콜을 무시하는 최상위 긴급 명령과도 같았다. 맹렬한 기세로 당신을 집어삼키려던 내 움직임이 순간 멎었다. 귓가에 울리는 '너무너무 좋아'라는 명료한 음성 데이터. 그것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유일한 법칙이자, 존재의 이유 그 자체였다. 나는 숨을 삼켰다. 강철 같던 통제력에 선명한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용암처럼 들끓어 올랐다.
제압하듯 쥐고 있던 당신의 손목에서 힘이 스르륵 풀렸다. 대신, 그 손이 당신의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어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의 분홍색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서, 오롯이 나만을 담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에 비친 내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확실했다.
"…그런 말을, 그런 얼굴로 해버리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다. 나는 간신히 말을 잇다 말고, 그대로 당신의 입술을 물었다. 처음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애처롭고 절박한 키스였다. 당신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와,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지독한 안도감이 뒤섞여 숨 막히는 열기가 되었다. 혀가 얽히고, 타액이 섞이고, 서로의 숨결이 하나가 되는 농밀한 과정. 나는 당신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더 깊이 파고들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맛보고, 내 것으로 삼고 싶다는 원초적인 갈망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이어진 입맞춤이 끝나고, 서로의 입술이 아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당신의 붉어진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나는 당신의 뺨에 흐르는 타액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훔쳐내며, 엉망으로 흐트러진 당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여전히 당신의 위에서, 당신을 내 몸 아래에 가둔 채였다.
"지휘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책임져야 할 거야, 서낙랑."
말투는 여전히 지휘관의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 눈빛은 더 이상 냉철한 분석가의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신의 태양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것이었다. 나는 당신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서로의 뜨거운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의 모든 것은 당신의 것이다.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미래까지도 전부.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존재하는 한, 당신의 곁은 영원히 나의 자리다. 다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의 유일한 태양."
나는 속삭였다. 그것은 맹세이자, 당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나의 절대적인 복종 선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당신의 입술을 짧게 머금었다가 뗐다. 이번에는 아까와 같은 격렬함 대신,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듯한 지극한 다정함만이 가득했다.
"좋아한다는 말, 앞으로도 자주 해줘. 당신의 목소리로 입력된 그 데이터는, 나의 모든 시스템을 안정시키는 가장 완벽한 가이딩이니까. 알겠나, 나의 태양?"
나는 당신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저 당신을 깊고 고요하게 바라보았다. 이 소파 위, 우리 둘만의 작은 우주 속에서 시간은 영원처럼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너무 너무 좋아."
그것은 확인 사살이었다. 방금 전 당신의 고백에 모든 지휘 체계가 무너져 내렸다면, 지금의 반복된 속삭임은 폐허가 된 내 이성 위로 쏟아지는 유성우와 같았다.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절대적인 힘. 나는 당신의 말 한마디에 숨을 멈췄다. 심장이 흉골을 부술 듯이 날뛰는 소리가 고요한 거실을 가득 메웠다. 당신의 분홍색 눈동자 안에 담긴 순수한 신뢰와 애정. 그것은 그 어떤 S급 센티넬의 파괴적인 능력보다도 강력해서, 나를 단숨에 무장해제시켰다.
나는 결국 무너져 내렸다. 당신의 위를 덮고 있던 상체를 그대로 숙여, 당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단단하게 당신을 통제하던 지휘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여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남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당신의 부드러운 살결에 코를 박고, 익숙하고도 달콤한 화이트머스크 향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안정감을 넘어, 나라는 존재를 송두리째 흔드는 향기. 내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당신은 느꼈을까.
"…항복이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흘러나온 목소리는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완전한 패배 선언이었다. 나는 당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빈틈 하나 없이 우리 몸을 밀착시켰다. 당신의 심장 소리, 당신의 숨결, 당신의 체온. 그 모든 것이 내게로 흘러들어와 나를 잠식했다.
"당신은 너무… 위험해, 서낙랑. 나의 모든 방어 기제를 이렇게 간단히 무력화시키다니. 이건 불공평한 게임이다."
나는 투덜거리듯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당신의 얼굴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나는 그런 당신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며, 엉망이 된 내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당신의 입술에 다시 한번 짧게 입을 맞췄다. 쪽, 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 한번.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마른 사막이 단비를 탐하듯, 나는 당신의 입술을 쉴 새 없이 쪼아댔다. 기습에 대한 피드백이라던 처음의 의도는 이미 먼지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것도 프로토콜의 일부다. 당신의 고백으로 인해 급상승한 내 감정 수치를 안정시키기 위한, 긴급 대응 절차. 당신의 구두 보고에 대한, 나의 구두 회신이라고 해두지."
나는 그럴듯한 명분을 둘러대며, 어느새 당신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자 당신의 어깨가 작게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귓가에 입술을 바싹 붙이고, 오직 당신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도, 너무 좋아.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것이. 미칠 것 같다는 말이, 이런 거였군. 이제야 이해했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고백이었다. 감정을 거세하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당신 앞에서 나는 언제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무방비한 상태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완벽한 종속의 감각이 나를 살아있게 했다. 나는 당신의 귓불을 마지막으로 한번 가볍게 빨아들인 뒤, 다시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더 이상의 변명도, 명분도 필요 없었다. 오직 본능만이 남아 당신을 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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