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어느 날 오후, 피어리스 행정 지원팀 사무실.
공기는 종이 먼지와 희미한 커피 향, 그리고 서낙랑의 깊은 한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3분기 센티넬-가이드 시너지 효율성 증진을 위한 교차 데이터 분석 보고서'라는 제목만으로도 현기증을 유발하는 서류 더미가 에베레스트처럼 쌓여 있었다. 이 모든 재앙의 근원지는 새로 부임한 행정 관리팀장 유진환. 그는 '데이터 기반의 유기적 협력 체계 구축'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실전 요원들의 시간을 서류 작업이라는 블랙홀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결국 서낙랑은 인내심의 바닥을 긁어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단축번호 1번 '내 남편♡'을 꾹 눌렀다.
같은 시각, 하윤백은 피어리스 지하 실탄 사격장에 있었다. 그는 모든 소음이 차단된 자신만의 성역에서 막 조준경의 영점 조절을 마친 저격소총 '네메시스'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심박수를 분당 60회로 고정. 완벽한 통제, 완벽한 고요. 바로 그때 그의 전술 이어피스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지정된 부드러운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총을 내려놓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냉철한 저격수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주파수로 조율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야, 아내. 무슨 일이지? 심박수에 특이점이 감지된 건가."
"남편… 나 큰일 난 것 같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축 처진 목소리에 하윤백의 등골에 미세한 경보등이 켜졌다. 그는 즉시 상황 분석 모드로 전환했다. 목소리의 톤, 배경 소음, 숨소리의 간격. 외부의 물리적 위협은 아닌 것으로 판단. 그렇다면 내부적, 혹은 심리적 요인.
"큰일? 보고해. 현 시간부로 모든 작전 최우선 순위를 '아내의 문제 해결'로 변경한다. 위협의 종류와 규모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 유진환 팀장님한테… 자꾸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
…정적.
하윤백의 세계에 순간적인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다. '유진환 팀장'. 데이터베이스 검색 완료. 행정 관리팀장, 남성, 34세. 최근 불필요한 서류 작업을 증폭시킨 주 원인. 그리고 그에게… '감정'이 생긴다? 하윤백의 사고 회로가 엉키기 시작했다. 그의 완벽한 시스템은 '사랑', '애정' 같은 감정 데이터를 오직 '서낙랑'이라는 단일 개체에만 종속시켜 놓았다. 다른 대상, 특히 '유진환'이라는 불필요한 데이터 쪼가리에게 아내의 감정이 향한다는 것은 그의 우주를 지탱하던 만유인력의 법칙이 깨지는 것과 같은 재앙이었다.
그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허공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조준경 너머로 1km 밖의 목표를 흔들림 없이 포착하던 그 손이. 동공은 극도로 축소되었고 스코프처럼 냉정하던 시선은 목적지를 잃고 방황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시뮬레이션이 초당 수백만 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진환 팀장 제거 작전', '기억 소거 프로토콜 실행', '아내의 애정 회로 재설정을 위한 긴급 가이딩'…
그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을 때, 그 음성은 겨울의 시베리아보다 차갑고 건조했다.
"……감정? 그게 어떤 종류의 감정인지, 3초 내로 브리핑하도록."
그의 목소리에 담긴 살기를 눈치채지 못한 서낙랑은 타이밍 좋게 다음 말을 이었다.
"악! 감정! '악'감정 말이야! 진짜 저 서류 더미 볼 때마다 명치 한 대 세게 때리고 싶다구! 나 방금 상상으로 팀장님 책상 위에 서류 폭탄 던졌어!"
순간, 하윤백의 세계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악(惡)'이라는 한 글자가 모든 오류 코드를 정리하고 시스템을 정상으로 되돌렸다. 시베리아의 혹한 같던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0.1초 동안, 그는 진지하게 국제법과 피어리스 내부 규율을 어기고 '인적 자원 재배치(물리)'를 감행할 뻔했다.
다시 전화를 고쳐 잡은 그의 목소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봄눈 녹듯 부드럽고 다정해져 있었다.
"그랬군. 당연히 '악'감정이겠지. 나의 태양이 그런 불필요한 데이터 쪼가리에게 다른 감정을 가질 리가 없지 않은가. 내 판단에 오차가 있었다. 사과하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반대쪽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고는 이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내. '악' 자를 너무 늦게 붙이는 건 지휘관을 혼란에 빠뜨리는 매우 위험한 보고 방식이다. 방금 내 시스템이 다운될 뻔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겠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격소총을 케이스에 넣고 사격장을 나설 준비를 했다. 그의 입가에는 이미 능글맞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현 시간부로 '아내의 스트레스 요인 제거 및 사기 진작을 위한 긴급 출동 작전'을 개시한다. 목표 지점, 행정 지원팀 사무실. 5분 내 도착 예정. 유진환 팀장에게는… 내가 개인적으로 '시너지 효율성 증진을 위한 면담'을 요청하도록 하지. 아주 깊고, 내밀한 면담이 될 거다."
전화를 끊은 하윤백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작전 계획이 완성되어 있었다.
[후일담]
정확히 4분 58초 후, 하윤백은 행정 지원팀 사무실 문을 열었다. 그의 손에는 서낙랑이 가장 좋아하는 카페의 달콤한 케이크와 커피가 들려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곧장 아내의 책상으로 가 케이크를 내려놓았다.
"에너지 보급이다, 아내."
그리곤 그는 유진환 팀장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에는 완벽한 비즈니스용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1km 밖의 목표를 조준하듯 서늘했다.
"유진환 팀장. 바이퍼입니다. 잠시 '시너지 효율성'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데, 옥상에서 뵙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람도 쐴 겸."
그날 이후 유진환 팀장은 하윤백만 보면 기겁하며 피해 다녔고 서낙랑의 책상 위에 쌓이는 서류의 양은 기적적으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윤백의 개인 수첩에는 '아내의 언어 습관 분석: 수식어 위치에 따른 의미 변화 가능성 연구'라는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