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평화로운 오후, 본부의 소음은 익숙한 백색소음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독립저격대 지휘관실은 그 소음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고요한 성역이었다. 하윤백은 모니터 앞에 앉아 다음 분기 훈련 계획 및 신규 장비 보급 목록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무감정하게 스크롤되는 텍스트를 좇았고, 미간에는 오차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희미한 주름이 잡혀 있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는, 완벽하게 통제된 일상이었다. 그가 내부 인트라넷 메인 화면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화면 우측 하단에 떠오른 ‘블라인드 인기 게시글’ 팝업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본래 이런 가십성 게시판에는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대부분은 실없는 푸념이나 업무 스트레스 토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낯익은 두 개의 코드네임이 제목에 굵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바이퍼’, 그리고 ‘메리아’. 그의 손가락이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지휘관실의 문이 잠겨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해당 게시글을 클릭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익명의 아우성이 담긴, 장난스럽지만 꽤나 절절한(?) 불만글이었다.

[HOT] 독립저격대 바이퍼-메리아 부부 제발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익명 | 작성일: 2025-10-08 14:15 | 조회: 988 | 추천: 152


본부 내 연애 금지 조항 없는 거 압니다. 두 분 다 S급, A급이시고 나라 구하시는 영웅인 것도 압니다. 4년 차 부부 금슬 좋은 거? 당연히 축하할 일이죠. 네, 머리로는 다 압니다.

근데 제 눈이 그걸 용납을 못합니다.

아니, 점심시간에 지휘관실 문은 왜 잠그시는 건데요? (물론 아무도 쳐들어갈 간 큰 사람은 없겠지만) 복도에서 마주치면 왜 자연스럽게 손부터 잡고 보시는 건데요? 가이드 메리아님이 지휘관님 옷깃에 붙은 먼지 떼주는 건 뭐 그럴 수 있다 칩시다. 근데 그걸 꿀 떨어지는 눈으로 쳐다보면서 머리 쓰다듬어주는 건 반칙 아닙니까? 여긴 전장 한복판이라고요 여러분.

지난번에 D게이트 정리 작전 끝나고 복귀할 때, 다들 지쳐서 좀비처럼 걸어오는데 두 분만 다른 세상이었던 거 아십니까? 지휘관님이 메리아님 발 아플까 봐 공주님 안기 시전해서 들어오시는데... 그 순간 차원문이 다시 열렸어도 몰랐을 겁니다. 저희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로 홍수가 나서 빌런들 다 익사했을지도.

제발… 저희의 정신 건강을 위해 사내에서는 공과 사를 조금만… 아주 조금만 구분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젠 지휘관님 무표정만 봐도 ‘아, 지금 아내분 생각하고 계시는구나’ 싶어서 현기증이 난단 말입니다.

결론: 두 분 행복하세요… 근데 저희 눈앞에서만 빼고요… 제발…

댓글 (13)
익명1: ㅋㅋㅋㅋㅋㅋㅋㅋㅋ내 말이. 이건 공론화해야 함.
익명2: 글쓴이 살아있냐? 곧 네 자리로 블루 록 날아갈지도 몰라…
익명3: ㄴㄷ. 지난번 카페에서 메리아님이 신메뉴 케이크 맛있다고 하니까 다음날부터 독립저격대 간식 전부 그 케이크로 통일된 거 실화냐? 나 이제 그 케이크만 봐도 이 시려.
익명4 (페어): (지나가는 부관) 케이크 맛있습니다!
익명5: 가이드팀도 만만치 않음. 메리아님 누가 조금만 힘들게 하면 다음날 그 센티넬 훈련 강도 2배 됨. 바이퍼 지휘관님 AI보다 더 정확하심.
익명6: 메리아님 별명이 왜 '태양'인지 알겠더라. 그분한텐 봄바람인데 우리한텐 시베리아 겨울바람임. 온도 차 무엇.
익명7: 그래도 두 분 보고 있으면 뭔가 마음이 몽글몽글해지지 않음? 나만 그래?
익명8: ㄴ 님 혹시 솔로 5년 차 이상? 병원 가봐.
익명9: 그냥 두 분 전용 CCTV 설치해서 ‘피어리스의 동물농장’ 같은 걸로 틀어주면 안 되나? 그럼 이렇게 몰래 안 봐도 되잖아. 시청료 낼 의향 있음.
익명10: 윗댓 천재냐? ㅋㅋㅋㅋㅋㅋ 근데 진짜 두 분은 본인들이 얼마나 티 나는지 모르시는 것 같음. 그게 더 발림 포인트.
익명11: 난 그냥 포기했어. 여긴 피어리스가 아니라 ‘바이퍼의 아내 사랑하기 본부’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음. 마음이 편해진다.
익명12 (가넷): (지나가는 팀장) 메리아 가이드, 오늘 컨디션 좋음. 이상.
글쓴이: 다들 고맙다… 나만 이렇게 염장 질 당하는 게 아니었구나… 동지들이여… 우리 모두 힘내자…
하윤백은 스크롤을 끝까지 내린 후에도 한동안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암호로 가득한 작전 보고서를 해독하는 것처럼, 그는 게시글과 댓글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고 분석했다. ‘공주님 안기’, ‘꿀 떨어지는 눈’, ‘머리 쓰다듬기’, ‘케이크 통일’… 익명의 동료들이 목격한 자신과 아내의 모습들이 데이터처럼 그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그는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평소의 냉철함 대신 아주 미세하고 깊은 파동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당혹감이나 분노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이 정도로 ‘관측’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언제나 당신의 안전과 평온을 최우선으로 했을 뿐, 그것이 외부에 어떻게 비칠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익명의 글과 댓글들은 적의나 비난이 아닌, 차라리 체념에 가까운 장난스러운 투덜거림이었다. 오히려 그 행간에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고, 심지어는 부러워하는 듯한 뉘앙스마저 섞여 있었다. 특히 ‘바이퍼의 아내 사랑하기 본부’라는 문장에서 그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아주 미세하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쁘지 않은 명칭이었다. 사실에 부합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첫째, 작성자를 색출하여 징계 조치한다. 하지만 글의 내용은 사실에 기반하며, 본부의 사기를 저하할 악의적인 목적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각. 둘째, 모든 것을 무시하고 평소대로 행동한다.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이다. 셋째… 그의 시선이 ‘저희 눈앞에서만 빼고요’라는 문장에 다시 머물렀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제복 재킷을 단정하게 여몄다. 그리고 지휘관실 문을 열고 망설임 없이 복도를 걸어, 가이드 대기실 쪽으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작전 계획이 수립되고 있었다. 작전명: ‘전략적 애정 과시를 통한 외부 관측 인원들의 인식 역치 상향 조정’. 쉽게 말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겠다는 의미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무도 불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완벽한 ‘남편’의 모습을 공식적으로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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