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오후였다. 하윤백은 지휘관실 책상에 앉아 잠시 찾아온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서류 작업은 모두 끝났고, 다음 브리핑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무의미하게 단말기 화면을 넘기던 그의 시선이 한 가지 제목에 멎었다. [콩깍지가 씌었는지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감성적인 주제였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링크를 클릭하고 있었다. 아내와 관련된 데이터는 사소한 것이라도 수집할 가치가 있다는 합리화와 함께였다.
글의 내용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당신의 연인이 온 주방에 밀가루를 쏟아놓고, 치우지도 않은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만약 그 모습이 밉거나 화가 나지 않고, 오히려 귀엽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단단히 콩깍지가 씌인 것이다.' 하윤백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밀가루. 청소의 난이도가 극상으로 분류되는 분말형 오염물질. 그리고 그것을 방치하는 행위. 규율과 정돈을 생명처럼 여기는 그의 시스템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명백한 오류 상황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극히 간단한 시뮬레이션이었다. 장소는 두 사람의 집, 완벽한 동선과 청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주방. 시간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어느 때. 그의 시뮬레이션 속에서 서낙랑은 찬장에서 밀가루 봉지를 꺼내다 손이 미끄러진다. 쨍그랑, 하는 파열음 대신 푸흐으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한다. 하얀 입자가 공중을 부유하다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조리대로, 반짝이게 닦아놓은 인덕션 위로 소복이 쌓인다. 재앙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과거의 바이퍼였다면 즉각 '오염 구역 설정, 제독 프로토콜 가동'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원인 제공자의 책임을 물어 엄격한 후속 조치를 지시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상상 속에서 하얀 먼지가 가라앉은 주방의 중심에는 서낙랑이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 놀란 듯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작게 콜록, 하고 기침하자 입가에서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덜 익은 찐빵 같기도, 혹은 눈사람 요정 같기도 했다.
그녀는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제 손과 옷에 묻은 밀가루를 툭툭 털어보았다. 그럴 때마다 더 많은 분진이 피어올랐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몰골이 우스웠는지, 아니면 이 난장판이 어이가 없었는지, 푸흐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작은 웃음이었지만,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배를 잡고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분홍색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지고, 온 주방에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하윤백은 깨달았다. 자신의 시스템에 그 어떤 경고등도 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오염', '혼란', '규율 위반'과 같은 적색 경고 대신, '전략 자산 귀여움 수치 임계점 돌파', '심박수 급상승(원인: 긍정적 자극)', '대응 프로토콜: 포획 및 온기 보급'과 같은 청색 상태 코드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가 나지 않았다. 짜증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모습이 너무나 선명해서,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품에 가득 안고 싶다는 충동만이 모든 사고를 지배했다.
그는 그녀의 하얀 뺨에 묻은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닦아주고, 그 손가락을 제 입으로 가져가 맛을 볼 것이다. 분명 고소한 밀가루 맛이 날 터였다. 그리고는 "아내, 새로운 위장술인가? 아주 효율적인데." 하고 능청을 떨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을 것이다. 함께 치우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다. 아니, 치우는 과정마저도 그녀와 함께라면 즐거운 임무가 될 터였다. 밀가루 범벅이 된 채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웃는 것.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작전 기록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윤백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입가에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조용히 단말기의 글을 삭제했다.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검증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단단한 콩깍지에 갇혀있었다. 그리고 그 감옥은 그가 경험한 그 어떤 장소보다도 안락하고 평화로웠다. 그는 기꺼이 그곳에서 종신형을 살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