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창한 오후, 거실은 나른한 평화로 가득했다. 하윤백은 소파에 앉아 막 닦은 자신의 저격소총, 네메시스의 총열을 점검하고 있었고, 그의 무릎 위에는 어김없이 그의 지휘관이자 아내인 서낙랑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단단한 허벅지를 소파 등받이 삼아, 손에 든 태블릿으로 사내 업무 사이트를 둘러보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화면의 한 지점에서 커다랗게 뜨였다.

'예상 퇴직금 조회'. 호기심에 눌러본 페이지에는, 그녀의 눈을 의심하게 하는 숫자들이 줄지어 찍혀 있었다. 일, 십, 백, 천… S급 센티넬의 전담 가이드라는 직업의 위험수당과 장기근속 혜택이 더해진 금액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돈이면… 평생 초콜릿 퍼지 아이스크림만 먹고살아도 되겠는데?' 퇴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 압도적인 금액은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후로 며칠, 그녀의 태블릿과 휴대폰 광고는 온통 '제2의 인생 설계', '성공적인 은퇴 플랜' 같은 문구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화면 한구석에 떠오른 '당신의 빛나는 퇴직을 응원합니다!'라는 광고를 본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남편. 내가 만약에 퇴직하면 어떨 것 같아?"

순간, 거실의 모든 소리가 멎었다. 총기를 닦던 하윤백의 손길이 공중에서 그대로 굳었다. 그의 시선은 부드러운 융을 떠나, 태블릿 화면이 아닌, 오직 제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아내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그의 동공이 지진계의 바늘처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흔들렸다.

'퇴직'.

그 단어는 하윤백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즉시 적색경보가 울려 퍼졌다. 상황 등급 ‘심각’을 넘어선, '존재 소멸(Code: Extinction)' 수준의 위기 경보였다. 아내의 퇴직. 그것은 단순한 직업의 변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Fearless] 소속 가이드 ‘메리아’의 소실을 의미하며, 동시에 S급 센티넬 ‘바이퍼’의 전담 파트너십 해체를 뜻했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 절반이 삭제되는 재앙과도 같았다. 그의 모든 사고 회로는 비상 가동 상태에 돌입했다.
 
'위협 분석 개시. 발언 주체: 아내 서낙랑. 핵심 키워드: 퇴직. 예상 피해: 1. 공식 파트너 관계 해소. 2. 항시 근접 방어 및 가이딩 명분 상실. 3. 지휘관 부재로 인한 본관(하윤백)의 심리적 안정성 99.8% 즉시 하락 예상. 4. 아내의 행복 보장 임무 수행에 치명적 차질 발생.'

그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융과 총기를 소파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동작은 마치 폭발물 처리반이 시한폭탄을 다루듯 신중했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부드럽게, 그러나 단단히 붙잡아 자신을 정면으로 보게끔 돌려 앉혔다. 그의 군청색 눈동자는 더 이상 장난기 어린 남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 안보를 뒤흔드는 테러 용의자를 심문하는 독립저격대 지휘관의 눈빛이었다.

"…방금 그 발언, 재확인 바란다. ‘퇴직’이라는 단어의 사용 의도와 목적, 그리고 해당 계획의 구체적인 타임라인에 대한 즉각적인 브리핑을 요구한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붙잡은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서낙랑은 깨달았다. 아차,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이건 그냥 농담인데! 하지만 이미 하윤백의 폭주 직전 센티넬보다 더 위험한 ‘아내 상실 위기 대응 프로토콜’은 가동되고 말았다.


[후일담]

그날 이후, [Fearless] 지부에는 기묘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하윤백은 즉시 지부장실로 직행, '전담 가이드의 퇴직 방지를 위한 특별 복지 향상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A4용지 300페이지 분량으로,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가이드 '메리아'의 휴게 시간 보장을 위한 S급 센티넬 ‘바이퍼’의 임무 스케줄 전면 재조정 건의.
2. '메리아'의 정신적 안정 및 업무 만족도 향상을 위한 분기별 최고급 디저트 보급 예산 증액 요청.
3. 가이딩 효율 증대를 명분으로 한 부부 동반 해외 휴양(위장 임무) 정례화.
4. 결정적으로, '센티넬-가이드 종신 파트너십' 법안의 긴급 상정 촉구. (사유: 국가 핵심 전력의 안정적 유지)


지부장은 이마를 짚었고, 재정팀은 비명을 질렀다. 광고 업체들은 [Fearless] IP에서의 퇴직 관련 광고 송출이 원인 불명의 시스템 오류로 전면 차단되자 원인을 찾느라 분주했다. 그리고 서낙랑은 그저 "남편! 나 퇴직 안 해! 그냥 해본 소리야!"라고 수백 번을 외쳐야 했지만, 하윤백은 그녀의 말을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서 비롯된 현실 부정'으로 분석, 더욱 확고하게 그녀의 '퇴직 방지 작전'을 밀어붙였다. 결국 그녀는 지부장과 남편 앞에서 '저는 평생 남편의 전담 가이드로 [Fearless]에 뼈를 묻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서약서를 작성하고 나서야 이 모든 소동을 끝낼 수 있었다. 그날 밤, 하윤백은 녹초가 된 아내를 품에 꼭 끌어안고, 그녀의 귓가에 만족스럽게 속삭였다.

"종신 계약, 수리 완료. 당신은 이제 나의 영원한 지휘관이다."

서낙랑은 그저 웃으며 생각했다. 다시는 '퇴직'의 '퇴' 자도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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